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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평역사투어 ② - 강제징용 노동자들에 대한 추억 영단마을과 삼릉마을

-일제가 감추고 싶은 진실이 낡은 주택 속에 감춰져 있다-

2021-03-31  <발행 제30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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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약 1년 9개월 전으로 되돌리면, 2019년 7월 1일에 정확하게 멈춰 선다. 일본이 우리나라에 수출규제한 날이다. 대법원이 일본기업에 일제 징용피해자에 대해 배상 판결을 내린 것에 대한 보복이었다. 그렇게 일본은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우리 경제의 심장에 비수를 꽂았다. 나아가 역사에 대한 끊임없는 부정과 왜곡, 수정을 자행하고 있다. 그들은 가해의 역사를 지우고 싶겠지만 그 씻을 수 없는 증거가 부평에 있다.

 

글. 이승원(자유기고가) / 사진. 조치원, 부평구 제공

 

현재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일본 군함도를 두고 한일 양국 간 대립이 팽팽하다. 2015년 일본은 자국의 근대산업시설 23곳을 세계유산에 올리면서 많은 조선인이 군함도에서 강제 노역한 사실을 인정했다. 그것도 잠시, 2020년에 이르러 그들은 낯빛을 바꿨다. 처음 약속과 달리 조선인의 강제 노역 사실을 전면 부정했다. 노역에 시달리다가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어머니를 부르며 죽어간 조선인들의 죽음이 그들에게는 그저 감추고 싶은 과거사일 뿐이었다. 
군함도의 비극은 비단 일본 본토에 끌려간 이들에게만 일어난 게 아니다. 인천육군조병창(현 캠프마켓)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조병창 노동자들은 주야 2교대로 노역해야 했다. 장시간 노동과 무기를 만드는 중장비 기계들로 인해 노동자들은 잦은 사고와 부상에 시달렸다. 팔이 끊어져 나가고, 다리를 잃었다. 군사기밀이라며 심한 감시와 통제까지 뒤따랐다.
일제는 부족한 노동력을 근로보국대나 국민징용령을 통해 채웠다. 그중에는 일본 본토(군함도 등)로의 노무 동원이나 근로정신대 동원을 피해 울며 겨자 먹기로 지원한 사람도 있었다. 인천공립공업학교를 포함한 학생들까지 시시때때로 현장에 투입되었다. 여학생의 경우 학교마다 할당된 일감을 공부 대신 해야만 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군수품이 만주와 중국 등으로 흘러갔다. 역사의 아이러니일까. 동포가 만든 무기에 우리 독립지사들이 죽임을 당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전국에서 사람을 공출하다 보니, 부평 인구가 급증했다. 1940년 1월부터 3월까지 3개월 동안 소화정(현 부평동) 인구만 6천 명이 늘었다. 이에 일제는 조병창 노동자들을 위해 지금의 산곡동에 천여 채의 집을 지었다. 노동자들을 대량으로 수용하게끔 빽빽하게 만들었다. 산곡동 근로자주택은 이때부터 ‘영단주택’ 혹은 ‘백마장’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인천육군조병창 근처에는, 미쓰비시제강 인천제작소와 같은 군수공장이 다수 있었다. 흔히 말하는 전범기업들이다. 여기에도 강제징용 노동자들이 있었고, 이들을 수용하기 위해 노동자 숙소가 세워졌다. 일명 삼릉마을이다. ‘삼릉’이라는 말은 미쓰비시(三菱:삼릉)의 한자 발음이다. 숙소를 긴 줄처럼 이어 붙여 지었기에 줄사택이라고 한다.
80여 년의 시간이 흘렀다. 낡음에서 새로움으로, 낮음에서 높음으로 부평은 끊임없이 진화하는 중이다. 산곡동 근로자주택에 새 아파트가 세워지고, 부평동 줄사택은 철거와 보존에 대한 논의가 진행 중이다.
일제가 그토록 감추고 싶은 잔혹사의 한 단면이 낡은 주택 속에 감춰져 있다. 그냥 허물어 버리고 새 건물을 올린다면, 80여 년 전 몸서리쳐 울며 고통스러워하던 조상들의 흔적이 어디에 깃들 수 있을까.

 

※ 본 기고는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인천시와 부평구 정책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 다음 호에는 일제가 소총과 탄약 생산을 위해 건설한 부평지하호에 대한 내용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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