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평에서 시인의 발자취를 만나다
-꾹꾹 눌러 쓴 숨결을 기억하리-
2016-02-26 <발행 제239호>
태어난 곳은 다르지만, 부평에 살다 세상과 작별한 두 시인이 있다.
한 사람은 노동자로 또 한 사람은 나병 환자로 시를 통해 사람과 세상에 손을 내밀었다. 비록 시인은 떠났지만, 이들의 시에 담긴 그 꿈의 흔적은 오늘도 부평 곳곳에 남아있다.
박/영/근
삶을 시처럼, 시를 삶처럼
노래한 시인 박영근
● 그를 일컬어 ‘최초의 노동자 시인’이라 부른다. 전주고를 다니다 중퇴를 하고 서울로 상경해 뚝방촌 방 한 칸에서 살았다. 뚝방촌에서 그는 교과서 속 노동자가 아닌 살아 있는 노동자를 만난다. 1985년 그가 부평에 새 터를 잡은 건 어쩌면 필연일지도 모른다. 그 당시 부평은 공장지대를 중심으로 노동운동이 활발한 노동자의 도시였으니. 그는 25년 세월 동안 부평에서 시를 통해 고뇌하는 노동자와 그들의 삶을 담았다. 2006년 향년 47세의 나이로 시인 박영근은 서둘러 먼 길을 떠났다. 부평구는 지난 2012년 시인 박영근 추모 시비(詩碑)를 생전 그가 자주 거닐었다던 신트리공원에 세웠다.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샛바람에 떨지 마라 창살 아래 네가 묶인 곳 살아서 만나리라” 그가 우리 곁을 떠난 지 올해로 10년. 살아서 만나자던 시인은 갔지만, 세상을 바라보던 그의 진솔한 시선은 오롯이 남아 우리 삶을 밝히는 등불이 되고 있다.
솔아 푸른 솔아
<솔아솔아푸르른솔아’곡의 원작 시>
부르네 물억새마다 엉키던
아우의 피들 무심히 씻겨간
빈 나누터, 물이 풀려도
찢어진 무명베 곁에서 봄은 멀고
기다림은 철없이 꽃으로나 피는지
주저앉아 우는 누이들
옷고름 풀고 이름을 부르네.
솔아 솔아 푸른 솔아
샛바람에 떨지 마라
어널널 상사뒤
어여뒤여 상사뒤
- 후략 -
<사진설명>
부평구에서 신트리공원에 세운 박영근 시인 추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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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하/운
한하운의 고독과 정서가
깃든 부평
● 한하운의 시는 슬프다. 그의 삶이 슬프고 절망스러웠기 때문일까. 평범한 한 줄의 시에도 고단한 그의 삶이 묻어 있는 듯 서글프다. 55년의 그리 길지 않은 삶 동안 22년을 나병 환자로 살았던 한하운. 1950년 부평 만월산 골짜기에 나병 환자 수백 명과 함께 나환자요양소를 만들며 부평과 인연을 맺었다. 한하운은 부평의 요양원을 성계원으로 이름 지었다. 성계원은 이후 국립부평(나)병원으로 바뀌었고 소록도에 국립나병원이 생기면서 폐지됐지만, 그 흔적은 청천농장, 경인농장 등의 이름으로 아직도 부평에 남아있다. 한하운은 1975년 간경화로 십정동 자택에서 사망한다. 그러나 죽어서도 인천에 묻히지 못하고 김포공원묘지에 그 묘가 있다. 2014년 인천의 인물로 선정됐으나 아직 기념물 하나 세워져 있지 않다. 올해로 그가 세상을 떠난 지 40년이다. 뒤늦게나마 그를 위한 시비라도 세워 그의 아픔과 삶을 더듬어 보자
부평 지역 청년단체연합회에 부친다
<한하운 시인이 부평 청년에게 바친 친필 유고>
우리가 살고 있는 우리 고장을
누가 부평이라 하였는가
얼마나 얼마나 기름진 땅인가
부평 평야는 우리의 넓은 마음으로
높솟은 계양산은 우리의 이상으로 하늘에 닿고
한강이 銀龍으로 굽이치고
강화, 영종섬이
관악산이 남한산이 북한산 산들이
부평을 품안고
선인들의 옛 읍터가
한촌 어느 변두리처럼
부평이 어찌 인천의 변두리인가
- 후략 -
<사진설명>
1995년 당시 경인농장 전경. 현재는 아파트 단지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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