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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목 (신라말∼고려초)

이희목은 신라말 부평지방의 호족(豪族)으로 부평 이씨의 시조(始祖)이다.
고려가 건국하자 태조 왕건(王建)은 부평고을에 와서 주권을 잡고 있는 이희목을 달래 높은 벼슬을 내려 부평고을을 무혈(無血)로 점령하였다. 그리고 고려태조는 이희목에게 고려개국벽상공신(高麗開國壁上功臣)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에 봉작하고, 그의 아들을 기인(其人)으로 삼아 개경(開京)으로데려갔다. 그 후에도 그의 자손에게 벼슬을 내려 요직에 등용하였다. 시호(諡號)는 충민(充敏)이다. 그의 증손인 이정공(李靖恭)은 시어사문하시랑(侍御史門下侍郞)을 지내고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러 부평백(富平佰)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부평을 본관(本貫)으로 세계(世系)를 계승해 왔다.

김인수 (신라말 ∼ 고려초)

김인수는 수주 김씨(樹州金氏)의 시조(始租)이다. 그는 부평고을의 호족으로 부평 이씨와 쌍벽을 이룬 문벌이다. 후손에 소감(少監)을 지낸 김정실(金鼎實)이 있고, 그의 후손은 번성하여 평안남북도 지방에 수백호가 살고 있다고 한다.

이정공 (고려 문종 ∼ 숙종)

이정공은 고려 개국공신 이희목(李希穆)의 증손이다. 그는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고 여러 벼슬을 지냈다. 문종 13년(1059)에는 예부외랑(禮部外郞)을 지냈으며, 이어 남원부사(南原府使)가 되었다. 재직중 삼예도(三禮圖) 5천부와 손유자서(孫柳子書) 92부를 신조하여 문종에게 바쳤는데, 왕은 이를 가상히 여겨 상으로 의상을 내렸다. 그리고 내직에 임용되어 한림학사(翰林學士), 예부상서(禮部尙書), 병부상서(兵部尙書), 태자빈객(太子賓客), 참지정사(參知政事), 수국사(修國史)등의 요직을 지냈다. 문종 37년(1083)에는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가 되고, 선종때는 문하판상서이부사(門下判尙書史部事)를 지냈다. 숙종 2년(1097)에는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오르고, 숙종 4년(1099) 5월에 그가 죽으니 왕은 애석하게 여겨 조위교서를 내려 부평백에 봉작하고 시호를 문충이라 하였다. 그리고 순종묘정에 배향하였다.

류흥정 (고려말 ~ 조선조초)

류흥정은 부평 류씨로 고려말에 낭장을 지냈다. 고려시대 당시 부평 고을에는 부평 이씨, 수주 김씨, 부평 류씨, 부평 박씨 등이 대성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현재 부평 류씨는 살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다른 류씨로 통합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이 의 (고려말, 조선초)

이의는 부평 이씨로 고려말 벼슬을 한 사람이다. 고려가 망하자 그는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하여 절개를 지키고자 두문동으로 들어가 은둔생활을 하였다. 이태조는 이 의를 불러내어 새 나라 조선에 출시를 권하였으나, 끝내 이를 거절하고 말았다. 그러자 태조는 이 의의 가산을 몰수하고 자연도(영종도)로 귀양을 보냈다. 이 의는 영종도에서 고려에 충절을 지키며 일생을 마치었다. 그의 고고한 절개를 본받아 부평 이씨 문중에서는 충신과 효자가 많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열녀신씨 (조선조 명종)

열녀 신씨는 조선 명종때 부평 고을의 영월 신씨집 처녀이다. 그가 9세때 집에 불이 났는데, 소녀의 몸으로 불더미 속으로 들어가 신주를 모시고 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12세때 계모가 들어왔는데, 그 계모를 친어머니처럼 모시고, 효도하여 온 마을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또 그가 출가하였는데 남편인 이명환이 병이 들자, 신명을 다해 보살피고 간호하였다. 남편이 급기야 죽자 그는 장례를 정중히 치르고 졸곡날 그는 남편을 따라가겠다고 자결하였다. 이와 같은 사실이 나라에 알려져 열녀정려가 내려졌다.

이계록 (조선조 선조)

이계록은 부평 이씨로, 자는 중수이고, 중종 23년(1528)에 부평고을에서 출생하였다. 선조 15년(1582) 사마시에 급제하고 참봉이 되었고, 선조 24년(1591)에는 문과에 급제하였다. 여러 벼슬을 거치면서 임진왜란 때에는 연안성을 수호하였고, 정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이 되었다. 그후 춘방대각에 오르고 의인왕후의 만사를 지었다. 선조 35년(1602)에 사망하였데, 나라에서 가선대부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이예수 (조선조 선조)

이예수는 부평고을 사람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남포현감으로 있을 적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는데, 의병을 모집하고 인솔하여 전주전투에 참전하였다. 그는 치열한 전투에서 많은 적을 사살하였다. 그때 엄지손가락이 부상을 당하자, 왼손으로 활을 당겨 적을 무찔렀다. 그러다가 결국 적의 총탄에 전사하였는데, 나라에서는 그의 전공을 높이 찬양하여 형조판서를 추정하였고, 충신의 정려가 내려졌다.

이제가 (조선조 선조)

이제가는 부평사람으로 전주 이씨 효령대군의 후손이다.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무관이 되었다. 북청 판관 재임 중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는데 조정에서는 전란을 피하기 위하여 왕자 위를 북청으로 보내기로 하고 지원군 윤탁연이 왕자를 모시고 북청에 머무르도록 하였다. 이때 왜장 가등청정의 대부대가 북청을 통과할 때 이제가는 부하를 거느리고 왜병과 격전을 벌였는데 중과부족이라 용감히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이 사실이 나라에 보고되니 그에게 벼슬을 높혀주고 충신의 정려가 내려졌다.

이언복 (조선조 선조)

이언복은 부평고을 사람이다. 소년시절부터 부평향교의 학생으로 자랐다. 임진란이 일어나자 왜병이 부평고을에 와서 부평청사와 향교에 불을 질러 그 일부가 소실되었다. 그 때 이언복을 비롯한 박무영, 박대양 등은 향교에 모셔진 공자와 열성들의 위패를 계양산정에 있는 장사굴에 은밀히 천양하였다. 이후 공로가 인정되어 나라에서는 생원의 직함을 내리고 부역을 면제해 주었다.

서채량 (조선조)

서채량은 장서 서씨로 부평부 동소정면 구산동 출신이다. 평소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였다. 어머니께서 노환으로 병석에 있을 때 위중하여 백방으로 약을 구해 드려도 차도가 없었다. 그때 어느 의원이 그 병에는 호랑이 간이 특효라는 말을 듣고 호랑이 간을 구하기 위하여 노력을 다하였다. 때마침 계양산 기슭기에 호랑이가 병이 들어 누워있다는 말을 듣고 그 호랑이를 잡아서 간을 내었다. 어머니에게 간을 들게 하여 소생하였다. 그후 이 사실이 알려져 그에게 사헌부 감찰이란 벼슬이 주어졌고 효자정려가 내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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