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달력을 보면서 - 박정순(삼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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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26 <발행 제333호>
거실 벽에다 걸어놓을 새해 달력을 구했다. 인근 금융기관에 일을 보러 갔다가 받은 것인데 종이와 글씨 모두 큼지막해서 일 년 동안 유용하게 쓸 것이다. 새 달력을 보니 문득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지금보다 달력 구하기가 어려웠던 어린 시절, 산골 마을의 아버지는 연말이 되면 여기저기서 달력을 구해오시는 게 가장 큰 소일거리셨다.?열두 달이 한 장에 표시된 달력은 마루 안쪽 벽에다 풀로 붙이고, 한약방이나 귀금속 가게에서 단골에게만 챙겨주는 일력은 하루 한 장씩 뜯어 쓸 수가 있어 화장지가 마땅치 않던 시절에 무척 소중한 재활용품이다.멋있는 계절 풍경 사진이 들어있거나 아름다운 여배우들이 고운 한복을 차려입고 있는 달력은 해가 지난 다음 교과서 표지를 싸거나 크레용 그림, 붓글씨 연습용으로 제격이었다. 아버지는 글씨가 큼직하고 음력이 함께 표시돼 있으며 날짜 밑에 공간이 넉넉한 민짜 달력을 안방 잘 보이는 곳에 걸어두셨다. 그리고 날짜 칸의 공간에다 매일매일 글자들을 빼곡하게 기록하신다. 가장 먼저 조상님들 기제사, 가족의 생일이나 집안 행사, 친척들 애경사는 물론, 마을 이장을 보시는 까닭에 동네 일상사까지 적어놓으시는 것이다.한문과 한글을 섞어서 쓴 아버지의 글씨는 맞춤법이 엉망이고 숫자 표기도 당신만 아는 식이라 내 눈에는 암호같이 보여 해독하기 어렵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면 뜯어내질 않고 맨 뒤로 넘겨놓으신다. 해가 바뀌어도 버리지 않고 선반 위에다 차곡차곡 몇 년씩 보관하시는 이유는 다음에 필요할 때마다 참고하여 들춰보기 위해서다.좀 더 커서야 아버지의 더 깊은 심중을 알게 되었으니, 가장이자 어른인 아버지가 우리 집안 대소사를 글을 모르는 엄마나 식구들한테 미리미리 알려주고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몸에 밴 습관으로 당신의 거친 일생 같은 들쑥날쑥한 글자들이 새까맣게 적힌 달력을 남겨놓으신 채 아버진 여러 해 전에 떠나셨다.문득 생각하니 나도 달력에 표시하는 버릇이 붙었다. 수십 년 사이에?나빠진 시력 탓이기도 하겠지만 화려한 달력보다는 멀리서도 눈에 잘 띄고 칸이 넓은 달력에 더 애착이 가는 것이다. 그동안 한 가정을 이끌어갈 안주인으로서 자연스럽게 터득한 경륜과 체험의 결과이리라.
어느덧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기. 이맘때면 다사다난했다는 말이 넘치지만, 어느 해인들 크든 작든 그냥 넘어간 적이 있었던가. 지나놓고 보면 올해 역시 나 개인이나 가정이나 사회, 국가와 세계적으로도 수많은 일들이 벌어졌고 그것이 세상의 순리 아닐까 싶다.
내년의 집안 대소사 해당일에 미리 표시를 해두었다. 아울러 아직 빈칸으로 남은 날짜의 공간에다 좋은 일로 표시할 일이 많은 해가 되었으면 참 좋겠다. 그리고 내년 12월 그믐날,?이 달력을?다시 들춰보며 내 생애에 가장 보람 있는 한해였다고 만족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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