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즈 부평 - 글 유수정(길주남로)
--
2021-10-27 <발행 제307호>
“너 어디 살아?”, “나? 부평!”, “부평? 부천?”, “부평지하상가 못 들어봤어?”, “아, 거기? 출구 엄청 많다는 곳?” 새로 알게 된 사람들과 대화하다보면 한 번쯤은 어디에 사냐는 질문이 나오곤 한다. 그럴 때마다 내가 빠뜨리지 않고 언급하는 장소가 있는데, 바로 부평지하상가다.
부평지하상가. 우스갯소리로 인천의 지하던전이라고까지 불리는 그 길고 복잡한 통로를 따라 걷다 보면 몇 해 전 흥행했던 ‘메이즈 러너’라는 영화가 떠오른다. 영화의 주인공들이 여러 난관을 거쳐 미로를 탈출하듯, 수많은 인파와 갖가지 유혹을 참아내야만 목표지점인 지하철 개찰구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초·중·고등학교를 모두 부평에서 나왔고 20년 가까이 부평에서 거주하고 있지만, 조금만 방심하면 처음 본 출구에서 지도 앱을 켜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하지만 이에 대해 부끄러움 따윈 없다. 왜냐. 출구가 33개나 되니까. 처음 놀러 오는 친구들이 백이면 백 길을 잃은 채 지하 분수대에서 옴짝달싹하지 못할 때, 저 멀리서 구세주처럼 나타나 “야, 나만 따라와!” 할 수 있을 정도의 길은 알고 있으니 말이다.
몇 년 전, 대학교에서 사귄 친구들을 부평에서 만나기로 한 적이 있었다. 역시나 “여기가 어디지? 내가 어딨는지 모르겠어.”라는 카톡을 받고 출동한 나는 그들을 안전하게 문화의 거리까지 인솔했다. 어미를 따르는 새끼오리라도 된 양 내 뒤를 졸졸 따르던 친구들이 감탄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와, 대박. 여길 어떻게 다 알아? 안 헷갈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언제나 같았다. “부평? 그까이꺼. 이것만 기억해. 직진, 꺾고, 씽크빅 문고!”
하지만 내가 어느새 30대가 되어버린 것처럼, 부평지하상가 역시도 그간 많은 변화를 겪었다. 가장 큰 변화는 지금으로부터 약 1년 전 “직진, 꺾고, 씽크빅 문고!”의 주역이었던 씽크빅 문고가 사라져버렸다는 것이다. 친구들을 기다릴 때면 종종 들러서 ‘아, 나도 책 좀 읽어야 하는데.’라고 뉘우치게 만들던 추억과 회한의 그 장소가 이제 더는 존재하지 않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나는 다른 어느 때보다도 나이가 들었다는 사실을 체감하게 되었다.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사람 나이 마흔이면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아직 9년이나 남았지만, 문득 거울을 볼 때면 나의 마흔은 어떠할까 상상해보곤 한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마흔의 나는 여전히 부평에 터를 잡은 채 매일 아침 지옥철을 타면서, 가끔은 친구들과 만나 평리단길의 어느 카페에서 수다를 떨다가, 주말에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평시장 옥수수를 먹고
있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그와 함께 이렇게 소망해본다. 내가 사는 이 동네, 내 가족의 터전인 이 부평이 부디 오래오래 힘을 내 지금의 10대, 10년 후의 10대들에게도 우리 세대의 씽크빅 문고를 대신해 줄 수 있는 핫한 장소들이 가득한 동네가 될 수 있기를.
자료관리 담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