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은 이야기 - 김미순(부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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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22 <발행 제27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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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 나는 학교 앞에서 자취했었다. 노부부가 자식들을 출가시키고 남는 방을 학생들에게 세를 놓은 집이었다. 집을 처음 보러 갔을 때, 먼저 내 방에 살고 있었던 학생은 흘러가는 말로 나에게 노부부가 싸움을 약간 하신다며 살짝 귀띔을 해 주었다. 나는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들었다. 상대적으로 저렴하게 세가 나온 데다 여러 가지 환경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나는 쉽게 이사를 결정했다.
처음 이사 가던 날, 나는 약간 싸움을 한다는 말이, ‘고함에 귀가 쩌렁쩌렁하게 울리고 창문이 흔들흔들하는 것’의 대명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유난히 목청이 좋으셨던 할머니 덕에 이사한 첫날부터 나는 본의 아니게 노부부의 사생활을 파악하게 된 것은 덤이었다.
할아버지는 모자를 즐겨 쓰시고 남에게 관심이 많아 사람 모이는 곳은 지나치는 법이 없으셨다. 일요일마다 전국노래자랑은 놓치지 않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시는 흥이 많은 분이셨다. 할머니는 그런 할아버지의 모든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셨다. 할아버지가 미용실이라도 들리는 날엔 여자들 모인 데에 들어갔다며 화를 내셨고, 어느 날은 꼴 보기 싫은 모자를 쓰고 다닌다며 할아버지의 모자를 모조리 싹 갖다버리는 바람에 대판 싸움이 난 적도 있다. 할아버지도 나름의 항변을 하셨지만, 대부분의 싸움에선 할아버지는 고양이 앞의 쥐였다.
어느 날, 할머니의 흐느낌이 벽을 타고 전해졌다. 할머니의 따님이 갑작스레 큰 병에 걸린 것이었다. 할머니는 시도 때도 없이 목 놓아 우셨다. 그렇게 한 달 뒤, 따님이 돌아가셨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졌다.
따님의 장례식 전날에도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싸우셨다. 할아버지가 “여자는 출가외인”이라며 할머니의 성질을 돋았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웬수가 죽었냐”며 할아버지에게 딸이 죽었는데도 그런 소리를 한다며 악을 지르셨다. 실제로 할아버지는 딸의 장례식에 가지 않으셨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이런 무심함을 두고두고 원망하셨다.
장례식은 일요일이었다. 모든 식구가 자리를 비운 그날, 거실에는 일요일 오후면 매일 흘러나오던 전국노래자랑의 노랫소리 대신, 적막만이 흘렀다. 적막 속, 거실 한구석에 앉아 홀로 깊은 슬픔을 한숨으로 내뱉는 할아버지의 한숨 소리를 오직 나만이 들었다. 늦은 고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