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보다 소중한 기억
-유용식(길주로)-
2014-10-24 <발행제22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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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 짙은 푸른 신록을 은근슬쩍 밀어내는 계절 변화를 마주하고, 심리적 평온까지 들썩이게 하는 가을 풍경에 도취해 가는 모두에게 자연의 섭리는 차분히 주섬주섬 추억을 입혀준다.
멈춰있을 수 없는 세상 흐름에 역행하지 못한 듯 오래 묵은 한 장의 졸업사진도 퇴색의 찬 기운을 피해가지 못했지만, 기억 속의 추억은 언어로 다 표현하기 힘든 거대한 양으로 특별한 의미를 내포한 채 이내 가슴에 남겨졌다.
현재를 포용하는 과거 속 추억이 비록 흐릿하고 초라하긴 하나, 가을 산 호화로운 변신에 견주지는 못할지라도 흑백 졸업사진의 엉성한 명암만으로도 마음 안에 행복한 기억을 가둔다.
더벅머리, 단발머리 어설프게 쓸어내려도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멋졌었고 쉬는 시간을 평정하던 60여 명의 아우성은 비록, 기승전결 없는 재잘거림이었을지언정 그 자체가 재미였으며 또한 놀이였으리라.
우정은 그런 북적임 안에 있었다.
거친 척 찡그려도 귀여웠던, 화난 척 흘겨봐도 예뻤던 순수는 내 편 네 편 편 가르기를 결국 멋쩍은 어깨동무로 막 내리게 했던 기억과, 작은 다툼에 먼저 손 내밀기 쑥스러워 며칠을 망설이다 찾은 궁여지책이란 남몰래 전해주려 삐뚤삐뚤 써내려간 쪽지 편지, 그것 또한 항상 자신이 아닌 친구들이 배달부가 되어주던 기억까지.
무엇이 옳고 그름의 정답인지 모르고 그저 마음 가는 대로 행하던 그 모습들을 회상하는 지금 이 순간이 최고의 망중한을 즐기는 게 아닐는지….
가을 정취를 머금고 생각 속에 손님처럼 찾아온 초등학교 친구들의 기억은 여전히 기쁨이며 익숙함인데 그 뒤로 파고드는 이 미묘한 심사는 뭘까?
있는 그대로의 상황에 사욕이란 없던, 그래도 일상이 즐겁던 그때와는 사뭇 다른 현실을 깨우는 것은 30여 년 전 기억의 가치이고, 그토록 마음속에 끼워 넣고 싶던 현재보다 소중한 과거 속 기억이다.
도망가고 쫓아가고 넘어지고 아팠어도 그 단순한 놀이가 즐겁던 때,
한 바퀴를 돌아서 제자리에 멈춰 서면 열이 오른 두 볼에 땀방울 흐를 만큼 큼지막하던 운동장.
한편의 수돗가는 우리 마음의 쉼터였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