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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평 이란 지명, 그 안에 담긴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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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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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평  이란 지명, 그 안에 담긴 이야기들

700년 동안 불린 지명, 부평
부평은 고구려 때 주부토군, 신라 때는 장제군으로 불리었다. 고려시대에는 수주, 안남도호부, 계양도호부(1215)로 바뀌었다.

1308년(충렬왕 34년)에는 계양도호부가 길주라는 지명으로 바뀌는데 지명과 관련해 매사냥을 즐기던 충렬왕이 매를 기르는 응방을 부평에 설치하고 이곳을 즐겨 찾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1310년(충선왕 2년)에는 길주목에서 다시 부평부로 개칭되며 부평이란 지명이 처음 등장한다. 이는 전국의 목(牧)을 없애는 조치에 따른 것인데 1914년까지 부평도호부라는 지명이 유지됐다. 1413년(조선 태종) 인천이란 이름이 처음 사용되었으니 이보다 100년이나 앞선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세종, 연산군, 숙종 때 부평도호부에서 부평군으로 세 번이나 강등되었다. 첫 번째는 1438년 세종 때이다. 온천을 좋아했던 세종은 부평에 온천이 있다는 말을 듣고 온천을 찾아보라고 명한다. 그러나 소문과 달리 부평에서 온천을 찾을 수 없자 세종은 왕이 자주 찾아오면 불편할 것을 염려한 부평사람들이 일부러 온천을 숨기는 것으로 생각하고 현으로 강등시킨다. 강등 이후 8년이 지나서야 다시 도호부로 복귀된다. 

1505년에는 부평출신인 내시 김순손이 죄를 지어 현으로 강등시킨 이후 1년 만에 제 이름을 찾게 된다. 1698년에는 김포에 있는 장릉 방화사건으로 출생지가 부평이었던 최필성을 사형에 처하고 현으로 강등시킨 이후 10년 만에 다시 복귀됐다.

이후 부천군으로 편입되었다가 1940년에는 인천부에 편입되고, 부평 서곶 출장소가 개설되면서 부평이라는 지명이 다시 등장했다. 1995년 인천이 광역시로 승격되면서 부평구와 계양구로 분구돼 오늘에 이른다.

부평의 산, 고개에 얽힌 이야기
산곡동에서 석남동에 걸쳐있는 원적산의 이름은 굴포를 못해 원한 맺힌 산이란 뜻에서 유래되었다. 부평도서관 뒤 함봉산과 호봉산은 호랑이 울음소리가 들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가 하면 부평삼거리에서 간석오거리에 이르는 고개를 ‘원통이 고개’라 하는데 이 고개는 굴포를 못해서, 또 골짜기가 한 개 모자라 도읍이 못되어 원통하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청천동과 효성동, 가정동을 동서로 잇는 ‘안하지고개’는 이성계가 아흔 번째로 세웠던 고개라는 뜻에서 비롯됐다. 장고개는 산곡동에서 가좌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인데 이곳은 과거 부평에서 인천 구도심으로 넘어가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김지숙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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