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고속도로 개통과 부평4공단 형성으로 발전의 물꼬 터져
-연재 ⑥] 우리 동네 이야기 - 갈산1동을 찾아서 -
2012-08-23 <>
임영대군 후손들 집성촌 이뤄
갈산동은 1945년까지 웃말, 아랫말, 새갈이라는 마을이 모여 갈월리라 불리었다. 이후 1977년 북구 갈산동으로 개칭 돼 지금에 이른다. 긴 세월동안 어떤 사람들이 살았을까. 1970년 때 까지만 해도 세종대왕 넷째 아들 임령대군과 효령대군(전주 이씨)집안이 집성촌을 이루었다.
이종성(67·갈산동) 씨는 “임영대군의 후손이 병자호란을 피해 부천 고당리 처가댁에 머물다 돌아가셨는데 그 자손들이 가까운 갈월리에 터를 잡았다.”라고 전한다. 그는 또 “5~6대부터 살기 시작해 현재까지 11대째 살고 있으니 약 330년 동안 이 씨 집안이 대를 이어 살고 있다.”라고 말했다.
임영대군의 후손 중 이찰·이율 형제의 이야기는 이미 유명하다. 효성이 지극했던 형제는 부친이 병들어 눕자 백방으로 약을 구해 봉양했다. 부친이 위독해지자 형제는 손가락을 깨물어 부친의 입에 피를 흘려 넣는 정성을 보였다. 부친이 세상을 떠난 후엔 묘막 옆에서 3년간 시묘살이를 했다. 이를 지켜본 마을 사람들은 형제의 효행을 칭찬했고 1670년 현종은 그 효성에 감복해 효자 정려를 내렸다는 이야기다.
원래 정려각(시·도 기념물 제 52호)은 갈산동 종손 집 옆에 있었으나 현재 계양구 갈현동으로 옮겨져 ‘전주이씨 임영대군파 덕풍도정종친회’에서 관리하고 있다.
역사와 함께 동네도 발전
도시화의 급물살에 옛 모습은 밀려났지만 기억마저 지워진 것은 아니다. 부평토박이인 이덕규(73·갈산동) 씨에 의하면 현 부평정수장이 있던 곳은 능선에 가까운 도당산이었다고 한다. 도당산은 엠코아파트를 지나 삼산동까지 이어졌으며 갈산동에서 주요한 위치였다.
“능선에 일본인들이 수도국을 만들다 말았는데 후에 그곳에 부평정수장이 들어서면서 이 지역이 발전하기 시작했죠. 또 6.25 전쟁 당시 계양산이 군사요충지였다면 도당산은 북한군이 내려오는 것을 저지시키는 작전능선이기도 했어요.”
지역이 활성화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다. 갈산동에 수출산업공단인 부평공단(이하 4공단)이 생기면서 밭농사와 논농사로 생계를 이어가던 지역민들이 점차 사라지고 대신 경공업이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이종걸(60·갈산동) 씨는 “4공단이 생기면서 전라도, 경상도 등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죠. 전성기이던 1970년대에는 현재의 갈산시장이 지금의 명동거리만큼 활력이 넘쳤어요. 공단에서 일했던 지방 사람들의 거주지가 대부분 그곳에 있어 많은 사람들이 오가던 중앙통로 역할을 했죠.”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그러다 공단의 규모가 작아지고 부흥로 등 새로운 길이 연달아 생기면서 시장 통을 지나던 사람들의 발길도 뜸해졌다. 하지만 뒤안길에도 희망은 다시 피어오르는 법. 여느 동네와 마찬가지로 갈산동 역시 시대와 맞물려 걸어왔고 지금도 발전해 나가는 동네로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무르익어가고 있다.
김지숙 명예기자
자료관리 담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