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의 삶을 품어주던 ‘고래우물’
-[연재 ①] 우리 동네 이야기 - 십정동 ‘열우물 마을’ -
2012-03-22 <>
백운역에서 동암역 사이를 열우물 고개라 한다. 이 고개 너머 산중턱에는 마을이 있다.
아주 오랜 시절, 마을에 열 개의 우물이 있다고 해서 사람들은 이 마을을 열우물(십정1동)이라 불렀다. 열우물은 약 2~3백 여 년 전, 4개(성, 구, 박, 신)의 성씨들이 주로 모여 살며 마을을 이루었다. 해가 잘 드는 양지 편, 함봉산 서쪽 산 밑인 음지편과 구성마을 세 개의 마을이 있었으나 현재는 그 이름이 희미해 졌다. 흔적조차 사라졌지만 한때 전국 최고의 천일염을 생산했던 주안염전을 곁에 둔 곳이기도 하다.
십정동 주민들은 예로부터 우물에 대해 남다른 관심과 애착을 보였다. 지금도 사용했던 우물의 흔적이 마을 곳곳에 남아있고 현재 주민들이 사용하고 있는 우물도 있다.
그 중 ‘고래우물’(십정동 79번지)은 마을사람들의 이야기를 품은 유서 깊은 우물이다. 최근 우물이 있던 자리가 경기장 건설 부지에 포함되면서 주민들이 가슴을 잠시 쓸어내리기도 했지만 다행히 우물이 사라짐을 안타까워하는 주민들의 마음이 전해져 보존이 가능하게 되었다.
주민들은 ‘고래우물’이 약 3~4백년 정도 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3~4m 깊이에 바닥이 훤히 보일 정도로 맑은 물을 담고 있다. 여름에는 매우 차갑고 겨울에는 따뜻한 성질이 있어 겨울마다 우물에 낀 물안개를 볼 수 있다. 긴 세월 주민들과 함께 해 왔던 만큼 전해지는 이야기도 수 없다.
신종백(십정1동 주민자치위원장) 씨는 “일제강점기 9년에 걸쳐 가뭄이 극심해 대부분 지역에 흉년이 들었는데 그때에도 ‘고래우물’은 물이 항상 넘쳐나 주변 논밭이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 “1964년에 들었던 극심한 가뭄에도 물이 없어 벼농사를 짓지 못했던 아랫마을 사람들이 고래우물에서 물을 길어다 사용했던 일도 있었다.”라고 한다.
성기석 씨는 십정경기장 부지로 논이 수용되기 직전까지 고래우물을 사용해 농사를 지었다.
성 씨는 “고래우물은 십정1동 주민들이 공동으로 사용했던 우물로, 식수는 물론 농업용수와 빨래터로도 사용되었다.”라고 증언한다.
도시화 되고 집집마다 수도가 생기면서 그 옛날처럼 우물터에 모여 정담을 나누는 모습은 사라졌지만 고래우물은 최근까지 농업용수로 그 가치를 다하고 지금도 맑은 샘물을 퐁퐁 쏟아내고 있다.
신 씨는 “사람들의 애환이 담긴 고래우물이 사장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잘 보존하고 가꾸는 것이 주민들의 바람.”이라고 말했다.
마당에서 강아지들이 봄 햇살을 털어내고 키 큰 고목나무위에 까치둥지가 있는 곳, 그 옛날 양지편이라 불리던 마을에 아직도 흐르고 있는 우물 물 소리가 듣고 싶다면 열우물 마을길을 천천히 걸어보자.
김지숙 명예기자
자료관리 담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