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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림병원 무료병동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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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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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림병원 무료병동 이야기


“이 세상에 춥고 배고픈 것만큼 서러운 것은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픈데 돈이 없어 치료조차 받지 못한 채 죽어가는 것은 더 서러운 일입니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7월 마지막 날, 어렵게 장기창 목사(세림병원 원목)를 만났다.
좋은 일을 하면서도 언론에 보도 되는걸 꺼려하는 장 목사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인데 그 일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냐고 겸손한 대답을 했다.
장 목사가 무료병동을 짓겠다는 꿈을 갖게 된 것은 1983년 병원 원목 사역을 시작하면서 부터였다. 환자들이 처한 안타까운 상황 앞에서 장 목사는 속수무책으로 눈물을 흘린 적이 많았다.
치료비를 감당 못해 그냥 퇴원하는 환자, 도망가는 환자, 치료비 문제로 속을 태우는 환자 등 병원에는 가난한 환자들이 많았다. 이렇게 안타까운 일들을 보면서 원목실 직원들과 주변 사람들을 상대로 월 1,000원의 후원회원을 모집했다. 소문은 금세 퍼져 나갔다. 1000원씩 모아서 그 엄청난 치료비를  어떻게  마련할 수 있단 말인가? 주변사람들의 비난과 충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장 목사는 꿋꿋하게 1000원을 고집했다. 1000원을 고집한 이유는 돈이 아니라 기도와 사랑의 힘이 더 크기 때문이고 평생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료병동의 첫 환자는 1급 장애인이었다. 돌이 지날 무렵 갑자기 열이 오르고 경기가 있어서 병원에 가 주사를 맞았는데 급격하게 열이 떨어지면서 온 몸이 구부러지는 장애를 얻게 되었다. 시장에 나가 고무장갑 등을 팔았는데, 40세가 넘으면서 몸에 무리가 와 병세가 악화되면서 병원에 입원을 한 것이다. 첫 환자가 퇴원하는 날,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아 후원자가 더 많이 늘어났다. 
무료병동 홍보맨 김영철(가명) 씨는 두 다리와 왼쪽 팔을 쓰지 못하는 장애를 갖고 있었다. 휠체어를 타고 다니기는 하지만 그래도 워낙 몸이 불편하다 보니 혼자 휠체어를 몰고 병원에 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세림병원에 도착했을 때에도 이러한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진료를 받고 입원하고 나서는 그런 걱정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심한 장애로 병상생활도 불편한 그에게 무료로 간병까지 받을 수 있게 해 주니 그제야 치료다운 치료를 마음 편안히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퇴원할 무렵,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무료병동 홍보맨이 되겠다고 했다.
새벽에 청소 일을 하는 김용선(가명)씨. 처음에는 심장이 좋지 않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심장의 어느 혈관에 구멍이 생겨 계속 피가 새기 때문에 빨리 수술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 이곳에서 수술을 받았다. 퇴원하는 날 자신이 받은 도움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몸소 겪으며 자신처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선한 이웃’이 되어 주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렇게 시작한 무료병동이 지금은 많은 후원자들이 동참하고 있으며 어려운 환자들이  혜택을 누리고 있다.
장 목사는 퇴원 후에도 살길이 막막한 이들을 위해서 무료병동 지원 사업과 CCP(불우한 환우를 퇴원 후 가정을 돌보는 일)을 보다 발전시키고 임종환자를 돌보는 호스피스활동도 본격화 할 계획이다. 
상담안내 ☎ 517-2946

김선자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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