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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정치의 선구자 죽산 조봉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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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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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정치의 선구자 죽산 조봉암

지난 1월 20일 대법원은 1959년 7월 이승만 정권하에서 간첩죄로 사법살인된 죽산 조봉암선생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내렸다. 이로써 “나는 계급독재사상을 배격한다. 공산당 독재도 자본가와 부패분자의 독재도 이를 강고히 반대하고 민주주의체제를 확립하려한다”는 정강을 내걸고 1952년, 1956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이승만에 대항했던 조봉암과 진보당에 대한 '간첩죄'는 조작이요, 정치적 마타도어였음이 52년 만에 증명되었다.
1889년 강화도에서 태어난 조봉암은 일제강점기에 일본, 소련, 상해 등지에서 조선독립과 해방을 위해 박헌영 등과 사회주의 활동을 하였으나 해방 후 그는 박헌영의 조선공산당과 결별하고 평화통일과 사회민주주의적인 정치노선을 표방하였다. 
그는 1948년 5.10 제헌국회를 구성하기 위한 최초의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인천부 을선거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46,647표 가운데 17,620표를 얻어 당선되었다. 미군정장관 윌리엄 딘 육군소장은 1948년 3월 17일 남조선과도정부 법령 제175호로 국회의원선거법을 공포하였는데, 당시 선거구역표에 따르면 경기도 인천부 을선거구는 인구 103,577명으로 부평지청관내를 비롯하여 만석동, 화목동, 화평동, 창영동, 금곡동, 송림동, 송현동, 서곶지청관내를 포괄하고 있었다. 따라서 오늘날 부평구가 배출한 최초의 국회의원은 바로 조봉암 선생인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물질적 풍요로움을 구가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한국예술종합대학 출신의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작가가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죽어가는 비극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다. 올 초 명문대 출신의 내가 아는 한 선배도 쓸쓸히 자신의 집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정직하고 세상과 타협할 줄 몰랐던 K선배는 번역을 하면서 어렵게 살아왔는데 병원에서 치료도 변변히 못하고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었다.
유난히 추위가 길고 구제역으로 농촌의 현실이 더욱 어려워진 오늘 “진보당이 걸어갈 길은 뚜렷합니다. 공산독재도 자본주의 독재도 다 같이 거부하고 인류의 새 이상인 진보주의의 진리를 파악하고 만인이 다 같이 평화롭고 행복스럽게 잘 살 수 있는 복지사회를 건설하는 것입니다”라고 외치는 죽산의 목소리가 쟁쟁히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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