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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을 꾸짖은 부평출신 내시 김순손

-부평도호부를 읍 정도인 현으로 강등시키기도-

2008-03-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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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TV에서 내시를 소재로 한 드라마가 인기다. 인천사연구소 남달우(산곡동) 박사는 내시 김처선이 왕 앞에서 하품을 했다면 부평출신 내시 김순손(金舜孫, ?∼1504)은 잠을 잘 정도의 배짱을 가진 환관이었다고 소개한다. 두 내 시는 모두 연산군에게 직언을 한 후 처형되었다. 내시 김순손은 영민하고 착실해 성종은 그를 신임하고 중히 여겼다. 성종실록에는  “환관 중에 부릴만한 자가 없기 때문에 환관 김순손이 비록 젊기는 하나 문자(文字)를 조금 이해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성종의 뒤를 이은 연산군은 아버지의 상중에 암말과 수말을 궐내에 끌어들여 교접하는 것을 구경하고, 또 부도덕한 짓을 많이 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김순손은 연산군에게 잘못되었음을 직언한 후에 의금부에 하옥되어 장 100대를 맞고 곧 제주도 대정에 유배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김순손을 의금부에 하옥해 결장 1백대하고 외방에 보내 휴식할 틈도 주지 말고 힘든 일만 시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곳에서 외방이란 제주도를 의미한다. 연산군은 제주목사로 하여금 김순손의 죄상을 문초해 처형하도록 했으나, 조종의 관료들이 재판도 하지 않고 벌을 주는 것은 부당하다는 상소를 연산군에게 끊임없이 올렸다.
 실록에는“지금 김순손의 죄는 좌우가 알지 못하는데 전하께서 홀로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하시니, 신들이 의혹됩니다.”라고 직언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1504년 김순손의 전 가족이 제주도로 유배됨과 동시에 참형에 처해졌다. 연산군은 그의 머리를 단봉문(창덕궁의 돈화문 왼쪽에 있는 문) 밖에 걸어두고 내시들마다 나가서 보게 하고는 내시부에 간직하게 해 바른말 하는 것을 경계시켰다. 뿐만 아니라 김순손이 태어난 부평도호부(종3품 관아)를 지금의 읍 정도인 현(종6품 관아)으로 강등하는 사태를 만들기도 했다.
 김순손의 죽음은 중종 대에 이르러 2품 상선과 정려문으로 혼령을 달래고 조선왕조실록에 올바른 신하[直臣]라 기록했다. 돌이켜 보면 목숨까지도 버리고 수장에게 직언을 한 환관 김순손이 부평의 역사적 인물로 기억되지 못함이 아쉬울 따름이다.

이혜선 기자 2hyesu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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