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작가가 들려주는 부평 스케치
-미래를 점치며 희망을 낚았던 굿판-

강릉 단오굿을 한다는 소식에 늦은 저녁, 서울 남산국악당으로 달려갔다. 초등학교 아이들을 가르치며 늘 내가 너무 부족하다고 느낀다. 이론적으로는 강릉 단오굿에 대해 유창하게 설명할 수 있지만, 실제로 그 강릉 단오굿을 본 적은 한 번도 없다는 이 이율배반적인 현실을 뭐라고 설명할 것인가. 그래서 없는 시간 쪼개어 보기로 한 것이다. 굿판은 질퍽했고, 흥겨웠고, 신명났다.
“어, 하나도 안 무섭네.”
어렸을 적의 무서웠던 기억과는 반대로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무녀는 나이가 꽤 들었음에도 나긋나긋했고, 상냥했고 귀여웠다. 그냥 옆집 아주머니 같다고나 할까?
어렸을 적에는 굿판이 자주 벌어졌다. 누가 아프다거나, 누가 죽었거나 하면 한바탕 굿이 벌어지곤 했다. 굿이 열린다는 소식이 온 동네에 퍼지만 우리네 어머니들도 없는 돈 만드느라 바빴다. 어머니들은 깊숙이 숨겨놓은 쌈짓돈을 꺼내어 무당을 찾아갔다. 덩달아 아이들도 바빠졌다. 굿 구경 할 생각, 굿 음식 얻어먹을 생각에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내가 살던 부평 역 앞(우리 바로 옆집)에 큰 만신이 살았다.(지금은 물론 돌아가셨지만) 어머니는 무당이라고 하지 않고 만신이라고 깍듯이 높여 불렀다. 집집마다 길흉화복을 점쳐주는 무녀를 어찌 높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징, 꽹과리 소리와 북소리가 울려 퍼지면, 마을 사람들이 꾸역꾸역 몰려왔다. 코끝을 간질이는 향냄새와 각종 음식 냄새가 뱃속을 후벼 팠다. 굿이 벌어지는 날은 그야말로 온 동네 잔칫날이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두 손을 마주 비비며, 소원과 액땜을 기원했다.
굿판의 하이라이트는 맨 마지막 솟을굿에서 작두를 타는 것이었다. 제법 높은 곳에 위치한 작두가 햇빛에 번쩍이면 우리는 놀란 눈을 크게 치켜뜨고 지켜보았다. 시퍼런 칼 날 위에 자그마한 발이 올라설 때면, 온 사위가 가라앉았다.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숨을 죽이고 있다 행여 꼴깍 침 넘어가는 소리라도 들릴라치면 제 풀에 놀라 입을 틀어막기도 했다. 혹시 내 침 넘어가는 소리에 무당이 실수를 하면 어쩌나, 그리하여 피가 철철 나면 어쩌나.
그동안 안 먹고 안 쓰고 모아왔던 그 귀한 쌈짓돈을 어머니는 덜컥 내밀었다. 어머니는 그 돈이 하나도 아깝지 않은 모양이었다. 무당에게서 받은 자식들의 미래가 적힌 종이를 집에 와 소중히 펼쳐드는 어머니. 행여 아버지가 볼세라 쉿쉿! 우리에게 입단속을 시켰다. 아버지는 굿을 보는 것도 무당에게 점을 치는 것도 무척 싫어하셨다.
무당이 점친 나의 미래는 “결혼을 늦게 하거나 안 하고, 재산은 별로 없을 것이다”였다. 결혼은 남들보다 빨리 했으니 그 말은 틀렸고, 재산이 별로 없다는 말은 그럭저럭 맞는 말인 것 같다. 하지만 뭐 가난하지는 않으니 이 또한 크게 신경 쓸 일이 아니다.
그렇듯 맞으면 어떻고, 틀리면 또 어떠랴. 좋은 일이 생긴다 하면 맞으면 좋고, 틀리면 그런가보다 하면 되는 것. 나쁜 일이 생긴다 하면, 맞으면 용한 거고, 틀리면 다행이고. 그렇게 그렇게 맞춰 사는 게 인생이 아니겠는가.
미래를 점치며 희망을 낚았던 그 옛날의 굿판. 경제가 어려운 이때 그때처럼 신명나게 굿판한 번 벌이는 것도 좋은 일일 듯싶다.
안선모(동화작가·인천연수초등학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