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건국 60년 부평 60년

-1948년 ‘군수품 공장도시’에서 2008년 ‘문화도시’로-

2008-08-22  <>

인쇄하기

 올해는 우리 민족에게 광복63년이자 건국60년으로 매우 뜻 깊은 해이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새로운 국가가 탄생하며 역사의 흔적은 곳곳에 남아있다. 부평의 건국60년은 어떤 모습일까?
 
부평 60년, 이렇게 변했다
 ‘짠물’로 대변되던 인천과 또 다른 정서를 갖고 있는 부평. 2008년 부평은 정주인구 56만에 하루 유동인구가 30만이 넘는 활기찬 도시로 성장했다. 또한 부평을 대표하는 문화가 된 인천부평풍물대축제는 국제적인 축제로 자리매김하며 부평인의 문화의식을 높여주었다.
 1948년 인천부가 인천시 78개정(부평12개정)으로 바뀌었다. 1968년에 이르러서는 중구, 동구, 남구, 북구의 4개 구청이 만들어졌다. 1981년 인천시는 직할시로 승격되며 1988년 북구에서 서구가 분구되어 신설되었다. 1995년 인천직할시는 인천광역시로 승격되고 같은 해 3월1일 경인고속도로를 경계로 남쪽은 부평구, 북쪽은 계양구로 나뉘며 북구는 부평구로 명칭이 변경된다.
1957년 4만3천명이던 인구는 2008. 7월 현재 569,539명(남자 285,459명, 여자 284,080명)에 이르게 되었다. 주택은 111,460호로 주택보급율은 67.6%, 21개 동에 566개의 통과 3,712개의 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재정자립도는 52.1%이며 교육기관은 총 121개소로 유치원 60, 초등학교 32, 중학교 17, 고등학교 12, 한국폴리텍대학 1, 특수학교 5개 등이며 공원은 74개소, 등록된 자동차는 210,234대 등이다.
 
보릿고개를 넘으며 희망을 키운다
 1945년 8월 15일, 우리민족은 해방을 맞았다. 일본군 군수품 제조공장이 세워졌던 부평도 역시 해방을 맞아 감격의 물결이 넘쳤다. 하지만 1950년, 부평은 6.25남침으로부터 9일 후인 7월 4일 인민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전사에 기록된 부평지구의 전투는 원통이 고개 전투, 부평역 전투, 부개동 송내 전투, 김포와 신리전투 등을 꼽는다.
 4·19와 5·16 사이의 기간 동안 부평지역은 경제적, 정치적으로 많은 혼란과 어려움을 겪는다. 1957년을 정점으로 원조가 줄고 경제개발은 활성화 되지 않아 지역경제와 주민생활은 극도로 어려웠다.
 부평주민들은 일자리나 먹을 것을 얻기 위해 대부분 미군부대 주변이나 역전 상가지역에서 거주했다. 하지만 그런 소득을 얻을 수 있는 사람도 극소수였고 대부분 구호품이나 일가친척에 의존해 살아야 했다. 당시 쌀 한 가마에 14,000환이었던 것이 19,000환으로 오르며 서민들은 더욱 어려운 생활을 해야만 했다.
 
한국경제의 선구자, 부평공단
 1950년대 당시 부평은 벼농사를 주축으로 하고 있었다. 부평평야는 농지가 비옥하고 남으로는 경인철도가, 북으로는 한강이 흐르고 있는 천혜의 곡창지대였다. 1965년 정식으로 ‘인천수출산업공단’ 의 인가를 얻고 부평경제는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한다. 1960년대 중반에 건설된 부평수출 공업단지는 생산과 수출에서 우리나라 경제의 견인차 역할을 맡게 되었다.
 1968년까지 인천 수출총액에 3.5%에 불과하던 수출실적이 1년 후에 24.4%로 급격히 신장했으며, 다음 해인 70년에는 무려 42.5%의 비중을 차지하게 함으로써 부평을 인천의 중심지로 탈바꿈시켰다.
 1968년 경인고속도로 개통과 더불어 부평은 1970년대 인천경제의 성장을 주도했다. 청천동에 위치한 동양철관공업(주), 부평동에 동아건설산업(주), 십정동에 서울제강, 작전동의 대일형강공업(주), 부개동의 배명철강, 산곡동에 한국베아링공업(주) 원창동에 경인에너지(주) 현재의 대우자동차인 새한자동차(주)까지 한국경제의 명실상부한 선구자가 되었다.
 당시 부평시장은 휴일이나 명절 때면 ‘궤짝에 돈을 담기 바빴을 정도’로 이 시기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고 한다. 1971년 공설시장이던 부평시장은 사설시장이 되고 같은 해 8월 부평진흥자유시장이 설립되었다. 이와 더불어 1979년 부평로지하도상가가 문을 열어 새로운 상권이 자리하게 된다. 1980년대 나타난 상업의 변화 가운데 가장 큰 특징이라면 시장의 증가를 꼽는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을 되새기는 부평
 문화의 불모지로 불리던 부평은 이제 문화체육관광부가 선정한 예비축제로 인천부평풍물대축제를 만들었다. 국제적 문화관광 축제로 정착시키기 위해 풍물상설공연장 건립, 풍물거리조성, 문화관광 상품개발, 생태체험과 연계하는 관광코스 개발 등도 추진될 예정이다.
 지난해 10월 착공한 부평문화예술회관은 지상3층 지하 2층 규모로 올해 말 준공 예정이다. 청소년수련관과 부개1동 문화사랑방도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고 있다. 이미 개관한 삼산월드체육관은 국제적 규모로 국제경기와 콘서트 등 각종 문화행사가 열리는 인천의 대표적인 체육 문화시설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부평역사박물관 역시 옛 부평문화권을 복원, 근대 이후 부평지역 역사·문화의 정체성을 확립해 가고 있다. 깨끗한 굴포천, 숨쉬는 푸른 숲을 만들기위한 노력도 끝이 없다. ‘굴포천 생태하천 복원사업’은 자연형 하천 6km에 걸쳐 친수공간을 조성하는 사업으로 오는 10월 준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생태습지 복원 등 동식물이 서식하는 친환경 생활공간이자 부평의 명소로 거듭 태어날 예정이다.
 
부평 600년을 향한 첫걸음
 세계를 향해 ‘하늘길’과 ‘바닷길’을 열고 있는 대한민국 관문 인천. 이러한 국제도시 인천의 주춧돌 격인 부평구는 자타가 인정하는 인천의 핵심도시이자 인천을 대표하는 맏형이다. 그 명성에 걸맞은 금융과 유통, 산업기반시설, 교통, 지방정치 등 모든 분야가 고르게 발달된 균형적 도시기능을 갖추고 있어 지속 성장 가능성과 무한한 잠재력이 꿈틀대고 있다.
 경제적 발전과 더불어 친환경적인 자연도시를 만들기 위해 굴포천의 환경문제를 개선하고 생태 숲과 공원녹지 등을 조성, 정비에 노력하고 있다.
 내 고장 부평을 사랑하는 57만 부평구민들의 다양한 관심과 애정 어린 충고가 부평의 미래 60년, 더 나아가 600년을 키워내는 힘이 될 것이다.
자료출처 : 부평사
 
이혜선 기자 2hyesun@hanmail.net
 
 
↑사진 설명 : 고속도로의 개통과 더불어 부평은 인천경제의 성장을 주도했다. 1969년 10월 10일에 촬영된 경인고속도로, 쭉 뻗어나갈 부평의 앞날을 상징하는 듯하다.
 
1986년 삼산동 농경지 주변모습
 

2006년 삼산택지개발지구 주변모습

 
 
신진 자동차 발주식(1966년 5월 26일)과
대우자동차의 매그너스 신차 발표회(1999년 12월 18일).
인천 경제의 중심으로 성장한 부평의 위상이 느껴진다.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질서 생활화를 홍보하는 안내문이 정겹다.
1988년 7월 26일 부평역 광장의 모습과 2008년 6월 1일 인천부평풍물대축제가 한창인 부평로의 모습
 
 
 
1991년 4월 23일 촬영된 굴포천 복개 공사 사진과 2008년 3월 21일 촬영된 세계 물의 날 기념행사. 도시 환경과 자연하천에 대한 부평구민의 인식 변화를 느낄 수 있다.
 
 
도로변에 서서 응원하는 모습과 길거리 전체를 차지하고 응원하는 모습이 대조적이다. 달라진 응원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두 사진. 1988년 9월 15일 올림픽 성화 봉성 현장과 2002년 6월 25일 문화의 거리 월드컵 응원 현장.

목록

자료관리 담당자

  • 담당부서 : 홍보담당관
  • 담당팀 : 홍보팀
  • 전화 : 032-509-6390

만족도 평가

결과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