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작가가 들려주는 부평 스케치
-그리운 학교-
요즘 텔레비전을 틀기가 무섭다. 들려오는 학교 소식들이 마음을 언짢게 하기 때문이다. 선생님이 학생을 때려서 어쩌구저쩌구, 학생이 선생님을 때려서 이러쿵저러쿵. 도대체 세상이 왜 이렇게 변한 것일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에게 학교는 늘 그리운 곳이다. 부평남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의 기억이 너무나 생생하다. 어머니들이 교실 뒤편에 쭉 늘어서 있고, 선생님이 칠판에 나와 자기 이름을 써 보라고 했다. 아이들 대부분은 수줍어서 고개를 못 들었고 그나마 용기 있는 아이가 쭈뼛쭈뼛 칠판 앞에 나가 자기 이름을 삐뚤빼뚤 썼다. 그러면 뒤에 서 있던 어머니들이 손뼉을 쳐주었다. 그때는 자기 이름만 쓸 줄 알면 대단한 일이었다. 지금이야 한글 뿐 아니라 영어까지 다 섭렵하고 들어오는 일이 허다하지만. 지금 아이들과 비교하면 우리 어린 시절은 참으로 느렸던 것 같다.
2학년 때 담임은 여자 분이었다. 어느 날, 유달리 수줍어하던 내가 청소를 하고 있는데 선생님이 활짝 웃으며 호들갑스럽게 말했다.
“어머, 어머! 책상 줄을 정말 잘 맞추네.”
과연 내가 그렇게 책상 줄을 잘 맞추었을까? 또 책상 줄 맞추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칭찬할 거리를 찾아 아낌없이 칭찬을 퍼부었던 그 선생님이 아직도 눈앞에 삼삼하다. 4학년 때 선생님은 하모니카 부는 법을 가르쳐 주셨다. 그 날 이후로 나는 음악을 엄청 사랑하게 되었다.
5학년 때 선생님은 주판을 가르쳐 주셨다. 날마다 방과 후에 교실에 남아 주판 연습하던 기억, 주판 급수 시험을 보러 갔던 기억. 그리고 작은 주판알을 만지며 끝없이 펼쳐진 숫자의 세계로 빠져 들어갔다. 6학년 때 선생님은 요리 실습을 가끔 시키곤 했는데 그때 처음으로 ‘케첩’이란 걸 보았다. 시큼하고 달큼한 케첩은 이상야릇한 맛이었지만 마치 딴 세상으로 가본 듯한 뿌듯함을 안겨주었다.
초등학교 졸업을 할 무렵 부평 허허벌판에 부평여중과 부평동중이 생겼다. 그때 여자중학교는 달랑 북인천여중 하나 밖에 없었다. 빨간 구슬과 하얀 구슬이 잔뜩 들어 있는 통(추첨기라고 해야 할까?)의 손잡이를 오른쪽으로 세 번, 왼쪽으로 두 번 돌리면 가운데 뚫어진 구멍에서 구슬 하나가 쏙 튀어나온다. 학교에서는 아이들에게 손잡이 돌리는 연습을 시키고 또 시켰다. 날마다 꿈속에서도 나는 오른쪽으로 세 번, 다시 왼쪽으로 두 번 돌리며 연습을 했다. 내 걱정은 오직 한 가지였다.
‘혹시 구슬이 안 나오면 어쩌지? 그러면 중학교에 못 갈 텐데.’
그 걱정과는 달리 나는 빨간 구슬을 떨어뜨려 부평여중으로 배정받았다.
“너희들은 역사와 전통을 만들어 나갈 우리 학교 1회 졸업생이다.”
선생님들은 우리에게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는 공부하는 짬짬이 논바닥이었던 운동장을 보드라우면서도 단단하게 꾸미고, 화단을 예쁘게 꾸미고 지저분한 건축 폐기물을 날랐다. 우리는 학생이면서 막노동 일꾼이었다. 그래도 누구 하나 불평을 터뜨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곳은 내 학교, 우리 학교이기 때문이었다. 3년 동안 우리는 공부도 열심히 해서 인천의 명문이었던 인일여고에 무려 50여 명(이건 내 기억의 한계로 정확한 인원수는 잘 모르겠다.)이 당당히 합격했다. 당시, 그 일은 두고두고 사람들 입에 올랐다. 부평을 그저 촌 동네, 인천의 변방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인식을 바꿔놓는 계기가 되었으니까.
언제나 그리운 학교……. 나를 이만큼 길러주고 상상력과 감수성을 키워준 학교는 내 마음의 고향이다.
안선모(동화작가·인천연수초등학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