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작가가 들려주는 부평 스케치
-우리를 먹여 살린
또 하나의 어머니, 자연-
富平, 어떻게 보면 참 촌스러운 이름이다. 하지만 뜻풀이를 해보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넉넉한 평야. 이 넉넉한 평야가 가난하고 배고픈 우리를 먹여 살렸다.
부평동 760번지를 떠난 것은 그곳 생활 15년이 지나서 내가 부평남초등학교 4학년에 다닐 때였다. 그 동안 어머니는 우리 사남매를 먹여 살리려고 석탄 장수를 했고, 밀주를 만들어 팔았다. 부엌에 구덩이를 만들어 눈에 띄지 않게 깊숙이 항아리를 묻고는 필요한 사람에게 술을 건네줬다.
그렇게 고생고생해서 이사한 집이 바로 부평동 419번지(지금의 부평1동 185-110)였다. 넓은 뜰이 있고, 공동 화장실이 아닌 우리 가족만의 단독 화장실이 있는 집으로 이사할 때의 기쁨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집을 짓느라 빚을 많이 졌기 때문에 이사하고 나서도 우리 집 형편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먹을거리를 구하기 위해 두 오빠는 경찰대학교 뒷산을 지나 만월산을 넘어 공동묘지까지 진출했다. 햇볕 바른 공동묘지 칡뿌리는 다른 곳에 비해 유난히 굵었다. 커다란 칡뿌리를 목에 걸고 개선장군처럼 돌아오던 오빠들.
칡뿌리를 입에 넣고 질겅질겅 씹으면 쓴맛과 함께 단맛이 우려져 나왔다. 이른 봄이면 산과 들로 나가 쑥과 각종 봄나물을 캐왔다. 어머니는 쑥에 쌀가루가 아닌, 밀가루를 솔솔 뿌려 쑥개떡 만들어 주었다. 여름이면 오빠들은 개구리를 잡아 뒷다리는 구워먹고 나머지는 닭에게 주었다. 홍수가 나 굴포천이 넘치면 아버지와 오빠들은 양동이를 들고 나가 한 가득 물고기를 담아오곤 했다. 가을이면 벼메뚜기를 잡으러 들판으로 나갔다. 강아지풀에 벼메뚜기를 줄줄이 꿰어 집에 갖고 와 소금 살살 뿌려 볶아 먹기도 했다.
학교에 안 가는 일요일이면, 아버지와 오빠들은 주안 염전에 망둥이를 잡으러 갔다. 소금에 절여 말린 망둥이는 겨우 내내 반찬이 되어 상에 올랐다. 늦가을 추수가 끝날 무렵이면 두 오빠와 어머니는 이삭을 주우러 다니기도 했다. 넓은 뜰에는 닭과 토끼를 길렀다. 닭은 꼬박꼬박 알을 낳아 주었고, 번식력 강한 토끼는 한창 자랄 나이의 아이들에게 단백질 보충원이 되어 주었다. 토끼를 잡는 날이면, 나와 동생은 슬퍼서 눈물을 흘렸다.
“어떻게 저렇게 예쁜 토끼를 잡아먹을 수가 있을까?”
그러면 짓궂은 오빠들은 토끼 잡는 법에 대해 일부러 장황하게 설명하곤 했다.
그렇게도 먹을거리가 궁핍한 시절이었는데, 어머니는 깡통을 목에 걸고 이 집 저 집 기웃거리는 전쟁고아들이 구걸을 하러 올라치면 선뜻 집안으로 들였다. 어머니는 꼬질꼬질한 얼굴에서 눈만 반짝거리던 거지 아이 앞에 꽁보리밥과 김치 한 보시기뿐인 밥상을 차려주었다.
“실컷 먹어. 갈 때 밥은 또 싸 줄 테니까.”
밥상을 보고도 선뜻 다가서지 못하고 쭈뼛거리는 아이의 마음까지도 어머니는 헤아렸다. 누군가 이 아이가 가져올 동냥밥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먹을 쌀도 없는데 어머니는 왜 저러는 걸까?’
더럽고, 냄새 나고, 무섭고, 험상궂은 전쟁고아들이 그렇게 우리 집을 들락거렸다. 살림은 궁핍했지만 마음만은 넉넉했던 그 시절. 그 마음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나는 그것을 너른 부평의 들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를 품어 안아 잘 길러준 부평의 자연, 넉넉한 부평의 자연은 제2의 어머니였다.
지금 그곳 너른 들판에는 고층아파트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다. 너른 들판은 사라졌어도 그 마음만은 남았으면 하는 바람은 나의 욕심일까?
안선모 (동화작가·인천연수초등학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