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평역사의 뒤안길 양키시장
-한국전쟁 직후 형성…지금은 흔적만 남아-
▲위. 만수상회부근의 양키시장은 미제 물건을 값싸게 구입하던 곳이었다. 현재는 수선과 한복집들로 대부분 업종전환을 했다.
▲아래. 1971년 여름 부평시장의 풍경
옛 명성은 많이 잃었지만 여전히 사람들로 붐비는 곳 부평시장. 이곳에 ‘양키시장’이 있어 신촌(부평3동)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오는 각종 생활용품들이 판매 되었던 것을 기억하는 주민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하지만 1970년대만 해도 일명 양키시장에서는 ‘쩨’에 대한 갈망과 멋쟁이 소릴 듣기에 충분한 옷을 직접 고를 수가 있었다.
신기할 정도로 많은 외국 제품이 즐비한 양키시장에서 39년간 장사를 해 온 조영분(73) 씨는 “양키시장은 정말이지 별천지 였다”고 회고하며 “장사는 예전만 못해도 부평시장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고 말한다.
부평에서 살아온 30대 이상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기웃거렸을 추억의 거리다. 부평양키시장은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0년대부터 미국산 물품을 팔며 형성됐는데 이곳에 가면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군복과 통조림, 담배 등의 미제 물건을 값싸게 구입했다. 그러다 경찰이 단속이라도 나오면 순식간에 미제 물건들이 사라져 이른바 ‘도깨비 시장’으로도 통했다.
현 롯데백화점 부평점 맞은편 자리는 당시 화교학교였다. 부평의 화교학교는 차이나타운에 위치한 화교학교의 분교로, 이곳에서 4학년까지 마치고 난 학생들은 남은 5, 6학년의 학기를 차이나타운의 본교에서 보냈다. 당시 부평의 화교학교에는 40~50명의 학생들이 다니고 있었다. 부평에 화교학교가 있었을 정도로 중국인이 많았고 미국인도 많았다.
조 할머니 옆에서 수선집을 하고 있는 김명아(32) 씨는 “서울올림픽 당시에는 인천항을 통해 들어온 외국인들이 청바지 등 의류를 싹쓸이 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고 엄마에게 들었다”며 “요즘엔 그런 정도의 호황은 찾아보기 힘들다”고 말했다.
양키시장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의류매장도 비슷한 상황이다. 1980년대 후반 수입자유화 조치 이후 미국산 물품이 흔해지자 양키시장의 위상이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미군부대가 떠나며 당연히 상당수 가게들이 미국산 제품이 아닌 값싼 국산의류를 취급하기 시작했다.
최근엔 젊은 층을 겨냥한 항공점퍼 및 물 빠진 청바지, 가죽옷 및 벨트, 신발 등의 매장으로 전환하는 곳이 많아지고 있다. 그래도 부평시장에 수입 잡화를 판매하는 곳도 10여 군데 남아있다. 작은 공간에서 외국산 초콜릿을 비롯해 화장품, 커피 등을 판매한다.
1970년대만 하더라도 이곳에서 값싼 군복을 구입해 검정색으로 물들여 다니는 것이 유행이었을 정도로 번성해 100여 개가 넘는 노점이 성업 중이었다. 이제 그 흔적은 사라져 방송매체에서 자취를 찾는 취재 발길만 북적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