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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평 지역의 설화

-계양산이야기 / 충렬왕과 계양산 매사냥 -

2008-03-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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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시대에는 매사냥이 성행했고, 26대 충렬왕도 태자시절부터 그것을 즐겼다. 그의 매사냥은 부평과 인연이 깊었다. 태자 시절에 그는 원나라에서 파견된 집정관인 다루가치와 함께 부평에 와서 매사냥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때 수행해 온 이접(.摺)은 다루가치와 태자에게 아부하려고 고니와 따오기의 날개털을 뽑은 뒤 언덕에서 날리게 하여 매사냥을 쉽게 만들었다.
 그 뒤 태자는 원나라에 볼모로 보내졌으며 거기서 매사냥을 즐겼다. 그는 원나라 세조(世祖)의 딸 홀도로계리미실(忽都.揭里迷失)공주와 결혼했고 부왕이 죽자 공주와 함께 귀국해 왕위에 올랐다.
~~중 략~~
 충렬왕은 매사냥을 하고 싶어 못 견뎌했다. 국영 매방은 서울인 개경에 있었다. 그런데 사육하는 매가 민가의 닭이나 오리를 공격하여 피해가 커서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졌다. “백성들 피해가 없는 한적한 곳에 매 사냥터를 만들어라.”충렬왕은 명령하였다. 임무를 받은 신하들은 전국을 돌아다닌 끝에 부평에 와서 계양산을 보고 만족했다. 사냥감인 꿩과 비둘기와 토끼가 많고, 멀리 서해가 바라보이는 훌륭한 경치가 왕을 즐겁게 할 것으로 본 것이었다.
 그리고 그곳은 이미 왕이 태자시절에 다녀간 곳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몇 달 만에 계양산에 국영 매방이 생겼다. 왕은 다섯 차례에 걸쳐 이곳에 왔다. “참 좋은 곳에 사냥터를 만들었군. 내 마음에 쏙 드네.” 왕은 몹시 기뻐하였다. 어느 해 가을, 왕은 왕비인 원성공주를 동반하였는데 왕비는 사냥을 싫어하였다. 그런데도 따라나선 것은 왕이 후궁 무비를 사랑하는 것이 싫어서였다.
  임진강을 건너고 김포 통진에 도착해 하루를 묵었는데 공주는 먹고 자는 것이 불편하다며 노여움을 터뜨렸다. “전하는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 임무인데 어찌 사냥만을 즐기십니까. 그리고 왜 나를 이 불편한 곳까지 데려와 고생시킵니까.” 왕은 말 한 마디도 못하고 묵묵히 바라보기만 하였다. 계양산 큰 고개에 도착하고서도 왕비는 매방 책임자를 꾸짖었다. “이곳에는 꿩은커녕 거위 한 마리 없는데 왜 전하에게 사냥을 권하여 나까지 험한길을 오게 한 것이냐?” 그리고 충렬왕에게 또다시 쏘아붙였다. 충렬왕은 왕비인 공주와 다투면서도 그 뒤에도 기어이 계양산에 왔다. “나는 매사냥을 안 하면 좀이 쑤셔 견딜 수가 없어. 왕비가 아무리 잔소리를 해도 소용없어.” 그는 수행해온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그리고 이곳을 자랑스러워해서 원나라 사신을 데리고 온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리고 그는 당시의 지명 계양을 길주목(吉州牧)으로 승격시켰다. 그 뒤 매방이 있던 곳의 고갯길이 경명현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계양산 주변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그 한자 지명보다는‘징맹이고개’라는 지명을 사용하였다. 충렬왕이 매를 징발했다하여‘징매’라고 한 것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 부평사』제2권 中
부평지역의 설화에서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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