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염전의 전설 십정동 558-7번지
-염전 없어도 인천은 여전히 소금 고장-
염전에서 일하던 40년 전이 엊그제 같다며
추억을 이야기하는 신인선 어르신.
1907년 최초의 근대식 염전은 현 부평구 십정동558-7번지 서울제강 정문부근이다. 이곳에는 지금 대형공단이 들어서 있지만 예전에는 염전이었다. 1960년 말까지 50년 동안 이곳에서 염부장으로 일했던 신인선(88.십정1동) 어르신은“십정동염전은 212정보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지역이었다”고 전한다.
17세에 소금 밟기로 염부의 일을 시작한 그는, 어느 날 염물을 받아둔 저수지에 공장을 짓겠다며 흙을 메우던 상황이 지금도 또렷하다며 기억을 더듬는다. “300명가량 되는 염부들이 흙을 메우지 못하도록 하기위해 모두 저수지에 들어갔더랬지. 그래도 대기업엔 어쩔 수 없어 결국 공장이 들어서게 되었다우….”십정동염전이 우리나라 소금 소비량의 대부분을 생산했던 시절은 이렇게 되면서 추억으로 묻히게 되었다.
염전에서 한 달 내내 일해도 쌀 한가마 값도 안 되던 시절이었지만 그곳에서 일터를 잃은 염부들은 현재 대부분 십정동과 주안역 뒤편에 모여 산다.

후에 천일염을 정제한 하얀 고운소금을 만드는 재염공장이 인천에 집중되어 전국수요를 충당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므로 반세기 가량 인천은 김장소금, 간장소금, 고운소금 등 모든 소금의 산지로 대표되었다. 산업의 발달로 지금은 인천에서 한줌의 소금도 나지 않지만 여전히 인천하면 소금을 떠 올리고 있다.
기자도 어린 시절 십정동염전을 바라본 기억이 있다. 어린 눈에도 직선으로 나뉜 소금 밭의 반듯함은 참 인상적이었다. 소금밭의 구도는 단순하기 그지없다. 지금 생각하면, 마치 서양화가 몬드리안의 구성이라는 추상화에 색을 입히기 전 모습과도 흡사했다. 십정동염전에서 일했던 또 다른 염부인 장금석(76.주안5동) 씨는“농사짓는 농부들이 논마다 특성을 알고서 비료와 물의 양을 조절하듯 소금밭도 각각 다른 특성을 파악해 소금을 만들어냈다”며 같은 소금밭이라도 물의 양과 염도를 조정해 각기 다른 소금을 만들어낸 기술자들이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그 외에 나머지는 모두 하늘에 맡겨야 한다. 신인선 어르신은“욕심을 부린다고 소금을 많이 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정성을 쏟아 간수를 만들고 하늘의 처분을 기다리는 것이‘염부’가 할 일이었다”라고 말하며 소금밭을 닦고 정성을 들이면 하늘이 주는 소금의 양도 달라지더라고 경험담을 털어놓았다. 인천향토사연구소에서는 염전에서 일했던 염부를 찾아 노동요 발굴 작업을 벌여 ‘인천 소금밭일 놀이’노래를 기록해 후손에게 알리는 작업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