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평 이씨 종친회 이기남 회장과 이노경 부회장이 족보를 보며 부평 이씨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부평(富平) 이씨를 아는 사람은 드물다. 인구수도 적다. 하지만 고려개국 공신 이희목을 시조로 고려 및 조선까지 이어져 온 부평의 명문호족이다.
문헌(부평이씨대동보)의 기록에 의하면 명문가답게 문중에서는 효자와 충신이 많이 배출되었음을 알리고 있다.
종친회 이기남(75) 회장은 “사실 부평엔 부평 이씨와 인천 이씨, 전주 이씨로 3李씨가 번성했다”고 전하며 “부평 이씨는 거의 천년을 넘게 부평에서 살고 있다”고 증언한다.
‘부평 이씨’가 터를 잡은 작전동은 예전 부평이었던 곳이다.
이 지역에서 시조인 이희목의 손자 이정공이 부평백(백작정도의 벼슬이름)으로 임명되자 그로부터 후손들은 부평을 본관으로 삼아 대를 이어왔다.
정공의 아들 3형제는 가문을 대표하는 인물로 나라에 큰 벼슬을 하며 고려말기까지 명성을 떨쳤다.
그 후 조선조정으로 와서 정공의 16세손인 이세화와 그 후손인 이위가 청백리에 오르며 부평 이씨의 가문을 빛내는데 크게 공헌을 했다. 현재 부평역사박물관엔 두 분의 공신록이 전시되어있다.
이노경(62) 종친회 부회장은 “행정구역상 계양구에 사당을 두고 있지만 원래 우리 조상들이 살던 터전은 엄연한 부평”이라며 “부평이씨가 부평의 토박이다”라고 강조한다.
원래 부평은 고구려에서 주부토군이라 불리다가 통일신라 시대에 장제군으로 개칭하고, 고려 성종 때에 수주, 문종 때에 안남 또는 부평이라 불렸다.
1995년 인천광역시 승격으로 부평과 계양으로 나뉘게 되며 오늘에 이르렀다.
2006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부평 이씨’는 남한에 총 10,280가구, 48,90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숫자로 보면 적기에 더욱 알토란같은 문중을 자랑한다.
역사는 거슬러 올라 부평 이씨 문중의 조선시대 마지막 벼슬을 지낸 이감찰은, 작전동 화전부락의 한복판 중심지 넓은 터전에 큰 기와집을 이루며 말년을 보냈다.
그러나 당시 개화의 물결과 외세의 침공으로 근심걱정을 떨치지 못하고 1927년 향년 76세로 세상을 떠난다.
일화로 손자인 이기경(고인) 씨는 “안아지(청천동과 가정동 사이) 뒤뜰 경내에 십여 통의 꿀벌을 쳤는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수많은 벌들이 모두 머리가 백색 띠를 두르고 있었노라”고 회고했다.
미물인 벌레도 주인의 사망을 애석히 여겨 슬퍼하며 주인과 같이 상복을 입었다는 이야기다.
덕을 쌓은 만큼 후손이 잘되더라는 이기남 종친회장은 “그곳에 기념비를 세우고 후손들에게 장학금 지급과 노인복지에 각별한 신경을 쓸 것”이라고 밝혔다.
부평이씨 사당은 계양산 아래에 있으며 매년 음력 10월에 큰 제례를 지내고 있다.
이혜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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