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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에 묻혀 버린 부평의 3·1 운동

-기념탑 하나 없어 아쉬워-

2008-02-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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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24일 황어장터(현 계양구청)에서 인천삼일운동의 절정을 맞았다.
 
 향토사학자 조우성('인천 이야기 100장면' '20세기 인천문화 생활연표'의 저자) 씨는 3.1 운동에 관한 자료를 뒤지기 시작한 결과 인천에서 무려 한 달 이상 격렬한 독립운동을 벌였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그동안 꾸준히 알려진 인천지역의 첫 독립만세 운동지는 인천공립보통학교였다. 1919년 3월 8일 오후 9시, 한 밤중에 4명의 젊은이들이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창영초등학교) 2층으로 올라갔다. 학교와 일본인이 주둔한 인천경찰서간의 연락을 차단할 목적으로 전화선을 절단하며 학생운동 거사를 위한 준비에 들어간 것이다.

 이들은 이 학교 상급생인 김명진(당시 18세·11회 졸업)과 이만용, 박철준, 손창신 등의 학생이었다. 그 후 주동자였던 인보 4년생 김명진 학생은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1년 6개월을 복역했고, 박철준, 이만용은 태형 90대, 손창신은 연소자라 풀려났다.

 주동자였던 고(故) 김명진 선생의 손녀딸인 김혜자(51·송도동) 씨에 의하면 “할아버지는 일본군을 피해 도망 온 유관순 열사를 집에 숨겨주며 인천의 학생운동을 주도하셨다”고 증언한다. 어른의 유족들은 국가에서 지급되는 연금으로 ‘김명진 장학재단’을 만들어 후학을 위해 쓰고 있다. 하지만 “광복 후 오랫동안 국가로부터 무관심 받았는데 2002년 모교인 창영초교에 동상이 건립되며 조금이나마 보상받았다”고 서운한 마음을 달랜다.

 이를 뒷받침 하는 것이 샌프란시스코 교민단체 신한민보이다. 1919년 4월 29일자 내지독립단의 소식(인천)에서는 ‘인천에서도 다수의 관민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짖어 시위는 시작 되었다’고 쓰고 있다. 3월 13일, 소래면과 부평읍 주민 수백명이 소래산에서 불을 놓고 만세를 불렀으며, 부평지역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모여 시위를 한 바 있다고 전한다.

 부평에서 만세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지며 군중들은 면사무소를 파괴하고 경찰과 격투를 벌여 부상자가 속출했다. 인천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붙인 만세의 불길은 부평(13일), 규모면에서 전국최대 시위지인 강화(18일) 9개 지역과 황어장터(24일)로 번졌다. 개항장인 인천에서 한 달간 벌어진 만세운동은 공식적으로 8건이다. 인원은 9천여명이 참가했고 이 중 15명이 체포됐다.
 

인천 창영초등학교에서는 당시 인천의 삼일운동을 증언하는 기념비가 묵묵히 자리하고 있다. 
 
더구나 부평지역은 일본 땅 바깥에서는 유일하게 조병창(무기제조창)이 있던 지역으로 한 달이나 독립운동이 계속됐다는 것은 놀랄만한 일이다.
 이렇듯 부평만세사건은 강화도 시위운동의 도화선이 되어 김포와 부천지역으로 연락을 취하며 규모면에서 자못 컸지만 부평엔 이런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계양구의 경우 황어장터 3.1 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기념탑을 세운 것과는 대조를 이뤄 안타깝기만 하다.
 
이혜선 기자 2hyesu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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