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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포천아! 손돌의 넋 기리거라

-홍 성 덕(청천1동) -

2007-03-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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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포천아! 손돌의 넋 기리거라

굴포천! 이름만 들어도 설렌다. 소년 시절에는 대보둑(굴포천의 속칭)의 조개를 줍는다며 읍내(계산동)에서 용마루(용종동)와 살라리(당시 계산2동)를 거쳐 도두머리(서운동)까지 삼삼오오 무리지어 휘저었었다. 메기가 떼를 지어 노닐었다. 부평 평야를 황금 물결치게 한 고향의 젖줄로서 사랑을 흠뻑 받아 온 하천이다.
그래서 백암 조기준님의 향토 사료집에서 ‘부평의 물줄기 - 굴포천’을 탐독했나 보다. 굴포는 ‘판개’라며, ‘손돌목’의 유래부터 더듬어야 한다는 안내에 따랐다. 어릴 적에 들었던 ‘손돌이 추위’의 비밀이 풀릴 것 같아 더욱 깊이 빠졌다.
이야기는 고려시대, 몽고군의 난을 피하면서 시작된다. 고종 임금을 태운 배가 강화와 김포 사이의 물길을 지날 때였다. 사나운 물결에 조리질을 하며 파선지경까지 이른 것. 조급한 임금은 크게 노하며
“사공 손돌이 이놈이 나를 죽이려 함이 분명하다. 냉큼 그의 목을 쳐라.” 엄명에 손돌이 엎드려 뱃길의 사정을 아뢰어도 들어 주질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손돌은 뱃머리에 바가지를 띄워 “제가 죽더라도 위험하니 저 바가지가 떠내려가는 대로 배를 저어 가십쇼”하고 간곡하게 일렀다.
손돌이 숨을 거두자 갑자기 검푸른 구름에 북서풍이 휘몰아치는 매서운 추위와 파도가 날뛰는 하늘과 바다의 노여움이 있었다는 구절에서 슬픔을 함께 했다.
손돌의 뒤를 이은 사공이 배를 저었으나 사태는 더욱 악화되어 유언에 따라 바가지로 위험을 면하면서, 이 곳을 ‘손돌목’이라 부르게 됐다는 어이없는 사연에서 고개를 떨구었다. 죽음 앞에서도 남은 자를 생각한 손돌의 갸륵한 본심에 참았던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고종은 환궁해서야, 사슴뿔 형태의 암초가 깔린 해저의 지형적 특성으로 조류가 소용돌이치기에 만조에도 통과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제야 손돌의 무덤 앞에 사당을 세워 매년 제사를 지냈다니, 어리석은 군주의 뒤늦은 뉘우침에 다소나마 위안을 받을 수 있었다.
그 뒤 삼남지방 대동미의 안전한 운송을 위해 손돌목을 피하는 뱃길을 내려 했으나, 조선조 중종 때서야 굴천 작업을 시작해 부평 벌까지는 완공. 끝내 원통현은 뚫지 못했다는 굴포천의 여한이 부평구청 꼭대기로 오르게 했나 보다.
인천 제일이란 굴포천을 살폈다. 주차 난 해소에 도로 확장이란 명분 아래 복개되어 쥐꼬리만큼 남은 굴포천! 건천에다 생활 오수로 방치된 하천을 바라보며 수중 공원의 밑그림을 그렸다. 구청 앞 삼각지를 파내고 하천의 썩은 흙을 교체함은 물론 깨끗한 물만을 흐르게 하고는, 우리나라 지도를 들여앉히는 일이다.
한반도의 모양 따라 자연석으로 쌓고는 맑은 물 지킴이인 물옥잠을 띄워 수중 화단을 조성하면 된다. 사거리 쪽의 코너에는 제주도를 배치하고 중앙에 구의 상징 동물인 백마 군상의 분수대를 설치하면서 해안선을 따라 탐조등을 나열해 밝힐 때, 공원의 야경은 볼만하리라. 서울 7호선 지하철이 부평구청역까지 시원스레 뻗어 천마터널과 멋지게 조화된 교통의 중심지가 되면서 부평굴포천공원은 ‘한반도공원’이라는 별칭으로도 뜨리라! 천추의 한이 서린 굴포천은 손돌의 넋을 기리는 물줄기로 거듭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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