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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6 · 25 참전용사에 의한 증언

-부평역 부개동 원통이고개… 부평은 57년전 6.25 격전지 -

2007-06-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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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6 · 25 참전용사에 의한 증언

 
어느덧 세월이 무상하여 비극의 6.25를 맞은 지 57주년이 되었다. 그동안 많은 전우들이 이승을 떠났고 지금도 매년 역사 속에서 사라지고 있다. 나는 한강 연안 전선과 말주거리에서 부평까지 이르는 전투에 참가하였으며 천운으로 목숨은 부지하고 있다. 매년 6.25 기념행사를 전우들과 함께 가지며 안타깝게 생각한 것은 부평의 중심가가 6.25관련 전적지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하는 것이었다. 나는 다년간 6.25관련 부평의 전사 자료를 찾고 수집하여 정리하였다. 특히 인천상륙작전과 9.28 수복과 관련하여 부평역 일대와 부개동은 물론 부평묘지공원인 부개산과 경인국도 일대가 치열한 피의 격전지였다는 것을 후손들에게 새삼 알려 주고자 한다. 대부분의 자료는 대한민국 군사연구소 전사편찬위원회 인천상륙작전에 수록된 내용을 중심으로 작성하였다.
6.25 참전유공자회 부평지회장 김 종 구
 
  
 
1. 6.25전쟁 개황
6월 25일 새벽 4시 소련제 탱크를 앞세운 20만의 북한군은 38선 전역에서 일제히 남침을 강행하였다. 우리보다 2~3배의 병력 우세와 막강한 무기와 화력을 갖춘 북한군의 기습 공격으로 제대로 방어도 하지 못하고, 6월 28일 한강 이북의 수도 서울이 적의 수중에 떨어졌다.
적의 주력은 계속 경부선을 따라 공격하여 7월 15일에는 금강 방어선을 돌파하고 동월 20일에는 대전이 함락 되었으며 아군을 새로 증파된 미 제25사단 및 제1기 병사단과 함께 강력한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고 온 힘을 다해 적의 공세를 저지하였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면서 9월 26일 정오에 중앙청에 한국해병대가 태극기를 게양하면서 마무리하였다. 같은 시기에는 낙동강 방어선에서도 반격을 개시하여 9월 28일에는 수도 서울을 탈환하였고 10월 1일에는 38선을 돌파하여 북진 10월 10일에는 원산 18일에는 평양에 입성 하였고, 11월 24일에는 한만 국경에 있는 혜산진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하여 삼팔선을 중심으로 밀고 밀리는 상황이 계속되다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의 조인으로 동족상잔의 피어린 전쟁은 막을 내렸다.
 
2. 부평지역의 주요전적지
6.25발발 당시는 김포반도 방어를 위해 부평지역 부대의 병력이 김포전선, 계양산 동쪽 방축리 일대 그리고 한강변 금호 부근에 배치되었다. 김포전투사령부의 부대가 김포비행장 탈환 공격 등 산발적으로 적의 공격을 일주일 정도 지연시키며 버텨내다가 7월 3일 적의 한강 도하로 오류동 방어를 포기하고 안양으로 재집결하면서 부평지역은 그대로 적군에 점령당하고 말았다.
부평지역에서 본격적인 전투가 발발한 것은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면서 파죽지세로 서울을 향한 진격의 과정 중 9월 17일에 이르러 아침 일찍부터 부평 지역에서 적의 저항에 부딪쳤던 것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9월 16일 마운트 머킨리 호를 떠날 때 맥아더 장군이 스미스 장군에게 “김포 비행장을 가능한 한 빨리 탈취하라”는 특별명령을 하였다.
한국과 미군 해병부대의 최우선 과제는 김포 비행장의 조기탈환이었다. 이때의 주요 공격의 축은 경인국도를 중심으로 부평역과 원통이고개와 마분리(현 부개동) 그리고 묘지공원인 부개산과 그 아래로는 만월산 등이 주요한 공격 루트였다. 공격은 한국군 해병대가 최선봉에서 선발 공격대 역할을 하였으며 뒤를 이어 미 해병대가 진격하였다.
한국군은 미 제5해병연대에 배속되어 해병 제3대대 9중대, 10중대, 11중대였으며 미 해병대는 5해병연대 1대대, 2대대, 3대대와 미 1해병연대 1대대, 2대대, 3대대였다.(1해병연대 1대대는 만월산을 통해 부천 성주산으로 진격하였음) 5해병연대의 주 임무는 김포비행장을 점령한 후 한강을 건너 서울을 서쪽에서 공격하는 것이었고 1해병연대는 경인가도를 따라 영등포를 점령한 후 서울을 남쪽에서 공격하는 것이었다. 9월 16일 밤 석바위를 지나 간석 오거리부근까지 진격하였다. 9월 17일 새벽 04:00 한국 해병 제3대대가 도화동의 숙영지에서 도보행군을 하여 석바위를 지나 06:00에 원통이 고개 입구에 도착하였다.
○ 적을 격파한 원통이 고개 (동수역에서 - 부평 삼거리역에 이르는 언덕일대) <사진1·3 참조>
5해병 연대 2대대가 포진한 이 지역은 십정동 일대 107고지에 1개 중대, 원통이 고개 마루 89고지(현재 호명사부근 산 정상)에 2.36인치 로켓포와 경기관총으로 증강된 소총소대를 배치하고 그 아래 길로 500미터 안에 대대 3.5인치 로켓포와 75미리 무반동총 그리고 전차들이 적절한 종심으로 대 전차방어진지를 구축하고 경인국도가 90도로 꺾여진 맞은 편 132고지(부개산 묘지공원 전망대 부근)에 1개 중대를 배치하면서 대 전차전투에 대비하였다.
당시 기록을 보면 89고지의 제2소대 병사들은 은은하게 지각이 진동하는 소리를 듣고 제2소대장 ‘호워드’소위와 제2소대 병사들은 적의 T-34 전차 6대와 거기 올라타거나 뒤섞여 따르는 적 보병 200여명이 100m길이 안팎으로 종대를 이루어 다가오고 있는 것을 지켜보면서 소대장의 사격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전초 진지 앞을 지나치고, 원통이 고개를 내려 간 적의 마지막 전차가 90°로 굽은 큰 길을 막 꺾어 돌려고 할 때, 약 70m의 거리에 자리 잡고 있던 전초 진지의 2.36인치 로켓포에서 발사된 첫 포탄이 맨 뒤의 적 전차를 명중시켰다. 앞서 가던 적 전차 5대 역시 대전차화기들의 집중 사격을 받으며 전혀 대응할만한 여유를 갖지 못하고 시내로 돌진하였고 전차 위의 적 보병들은 순식간에 낙엽처럼 땅 위로 굴러 떨어졌다.
마침 원통이 고개 입구의 한국군 10중대 제2소대의 첨병들은 돌발적인 상황에 직면하여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4명의 첨병조 바로 뒤에는 소대 선임하사관 겸 제1분대장 임경섭 삼조와 그의 잔여 분대가 따르고 있었다. 약 150m 전방의 도로와 콩밭 사이에서 움직이는 것을 관측한 임경섭 삼조는 스스로 2.36인치 로켓포를 메고 침착하게 목표물을 조준한 뒤 방아쇠를 당겼다. 독 안에 든 쥐와 다를 바 없는 적의 저항은 사실상 미미한 것이었으며, 미 해병들의 로켓포 75mm 무반동총과 90mm 전차포들의 일제 사격을 받은 적의 T-34 전차는 1대도 온전할 수가 없었으며, 200여구의 적의 시체가 즐비한 원통이 고개 일대는 피로 물들었다. 단 1명이 가볍게 부상했을 뿐, 미 해병들은 문자 그대로 완전한 승리를 거둔 것이다.
 
○ 시가전이 치열했던 부평역 일대 (현 부평공원, 부평역 철길, 부평역 앞) <사진 2 참조>
한국 해병 제3대대가 미 해병 5연대 좌 전방으로 나가 계산동쪽으로 진출하기에 앞서서 주 공격 대대보다는 먼저 공격을 개시함으로써, 문제시 되는 이 건물 지대를 소탕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 지대는 대체로 지금의 부평 중심가 서쪽이 되는 이른바 조병창과 그 주변 일대의 공장과 주택가가 밀집된 지대로써 최초 부대가 진출하는데 걸림돌이었다.
9월 17일 아침, 적의 전차를 중심으로 한 반격 부대를 포착, 섬멸하고 그 잔적을 소탕하기까지 한미 해병 부대의 공격은 예정보다 늦게 시작되었다. 바로 1시간 전에 한국 해병 제 10중대 첨병이 행군을 멈추었던 곳에서 왼쪽으로 뻗은 소로를(현 부평 삼거리역에서 백운역 고가다리 방향)따라, 한국 해병 제3대대는 07:00에 진출을 재개하였다.
제11중대가 먼저 철로를 따라 나가면서 부평역 쪽으로 전개하였고, 제9중대는 약간 뒤늦게 소로를 따라 가다가 경인철도를 횡단하여 제11중대의 좌 측방으로 진출하였다. 다시 말하면, 한국 해병 제3대대는 미 해병들의 진출에 앞서 부평지역을 탐색·소탕하기 위하여 제11중대를 우 전방에, 제 9중대를 좌 전방에, 그리고 제10중대를 그 후방 중앙에 예비로 위치시키는 공격 대형을 취한 것이다.
제11중대의 선두에서, 철로를 따라 가다가 부평역에서부터 탐색 작전을 개시하려던 제3소대는 갑자기 부평역 바로 북쪽의 37고지(포도밭이 있던 작은 언덕으로 현재는 넬슨 전자자리)로부터 자동화기 사격을 받았다. 일시적으로 화차 뒤에 몸을 숨겼던 당시 제 3소대장 육동욱 소위는 그 화차를 은폐물로 이용, 전진하고자 대원들과 합세하여 화차를 밀고 나가다가 적의 총격을 받아 경상이기는 하나, 카빈 소총을 옮겨 쥐고 있던 왼손에 부상을 당하였다. 적의 진지로부터 감제되는 저지대의 철로를 따라 전개한 제11중대는 지형적으로 불리한 위치에서 화력을 집중하지 못해 사병 1명이 전사하고 여러 명이 부상을 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부평역 북쪽에 위치한 적의 사격을 신호로 한 듯, 거의 동시에 이른바 조병창의 서쪽 46고지에서 날아오는 적의 자동화기 사격을 받아 제9중대의 진출도 저지되었다. 제9중대는 이때 비록 개활지에 있었으나, 적으로부터 약 300m 이상의 거리에서 약간 언덕진 길 둑을 은폐물로 이용할 수 있었으며, 침착하게 경기관총을 거치하고 적을 향해 사격을 집중했으나, 적의 사격 망에 공격이 주춤하게 되었다. 이를 타개한 것은 한국 해병의 부평 지역 소탕작전에 대한 엄호 및 지원역할을 맡았던 미 제5해병연대 G중대였다. 신속한 공격으로 적 18명이 사살되고 46고지의 잔적은 도주 하였으나, G중대에서도 3명이 부상하였다.
한편 미 제5해병연대 제2대대가 한국 해병 제3대대보다 1시간 늦게 원통이 고개를 넘어 부평지역 동쪽으로 빠져 진출할 때, 이들과 함께 이동을 개시한 전차가 부평역 일대로 투입되자, 부평역 주변에서 한동안 저항하던 적은 급히 도주하거나 주택가로 숨어들었다. 오전 중 한국 해병 제3대대는 미 제5해병연대의 공격 대대들이 부평 지역을 빠져 나가기까지 대기하면서, 지원된 전차와 함께 그 일대의 소탕작전을 전개하였다.
 
○ 치열한 격전지 부개산 묘지공원 일대(208고지)와 부개동(구 마분리)전투 <사진 4 참조>
9월 17일 미 제5해병 연대가 부평 지역을 벗어나 김포 비행장으로 가는 동안 미 해병 1연대 2대대는 208고지일대(현재 부개산 묘지공원 산정일대)에서 북한군 1개 중대 규모의 저항을 받았으며 부개동 어귀에서(구 마분리) 또다시 진출이 중단되었다. 적의 주 저지선은 208고지에서 그 북쪽의 봉우리를 따라 부개동까지 이어졌다. 그러므로 부개산 208고지와 그 북쪽의 연봉들을 장악하고 부개동 일대를 장악하기 위해 항공지원과 5해병연대의 포병 지원을 받으며 뺏고 뺏기는 공방 끝에 한낮이 지나서야 208고지를 점령하였고 부개동 민가에서는 T-34 적 전차와 미 해병 전차부대의 치열한 전투와 시가전 끝에 16:00경에서야 부개동 전역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후로 3대대는 국도를 따라 2대대는 철로를 중심으로 김포공항과 서울로 계속 전진하였다.
 
3. 결어
부평지역에는 첫 번째 경인국도를 중심으로 하여 원통이 고개 일대와 부개동(구 마분리)마을 일대 그리고 89고지(현 호명사 윗산)와 길 건너 부평묘지공원인 부개산 186고지(묘지공원 전망대 부근), 208고지(부평묘지공원 산정 부근)들이 주요한 격전장이었고 두 번째로 부평역 철길을 따라 부평공원 일대와 현 부평역광장과 그 앞 언덕이(현 넬슨 전자 건물로 과거 포도밭 언덕이었음) 그대로 치열한 전투의 장소였다.
한국 해병대는 부평동 일대 시내 중심가를 장악해 나가며 최선봉에서 선발 공격대 역할을 하였으며 뒤를 이어 미 해병대가 진격하였다. 이렇게 부평 중심가는 전우들의 뜨거운 피를 쏟아 부은 피의 전적지이고 국적을 초월한 호국의 현장이기도 하다.
 
①소련이 공급한 T34/85 전차. 이 전차는 항공기의 로켓이나 폭격으로 인해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미 해병대 자료)
 
 

 
 
 
 
 
②9월 17일 부평 지역 한국해병대 및 미 제5해병연대 진출로.
 
 
 
 
 
 
 
 
 
 

③9월 17일 05:45 인천상륙부대의 접근을 알지 못한 북한인민군 제42전차연대 소속 T-34 전차 6대가 제18사단 소속 200여명의 보병들과 함께 이동하여 원통이 고개를 지나 부평삼거리 쪽으로 이동 중에 기습공격을 받고 뿔뿔이 흩어지는 광경.
 

 
④9월 17일~18일 미 제1해병연대의 진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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