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산·개울·우물·칡… 나살던 옛 풍경

--

2006-04-07  <>

인쇄하기

산·개울·우물·칡… 나살던 옛 풍경

산·개울·우물·칡… 나살던 옛 풍경

물이 맑은 내 흘러 ‘청천’ 불려
허허벌판 마장뜰 억새 천지
청천1동

청천1동은 1990. 5. 1 북구 청천동에서, 청천1동과 청천2동으로 분동됐다. 현재 25개통으로 7,700세대 20,000여명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서구와 계양구 구계 접속지역으로 청천공단이 있고, 공단에는 외국인 근로자들이 다수 있으며,  일제 치하의 잔해 조병창과 일본인 노동자들 관사라 불리는 검정사택, 구사택 등 작은 평수의 집들이 다닥다닥 밀집돼있다.
물이 맑았기로 맑은 내(淸川))라 불리었던 청천개울가 마을은 격동의 세월을 살았지만 변화가 그리 많지는 않다.
신병오(59)씨는 청천동이 타향이긴 하나 40년 가까이 살았으니 동네 뒷이야기를 덧붙일 수 있노라 했다.
“청천동엔 큰 하천이 두 개가 있었는데 지금의 철마산인 원적산과 마제봉에서 시작된 맑은 물이 자동차매매센터 앞길과 영화다방 앞길 두 갈래로 흘러나왔었죠. 복개돼서 물대신 차들이 왕래하고 있지만 수도가 없던 70년대 바로 전엔 물 길어 먹고, 목욕하고, 고기 잡아먹고 그랬지요.”
원적산 골짜기를 오르면 산중턱에 넓은 산골마을이 있는데 양계마을 또는 청천농장이라고 불렀단다. 자생적으로 모여든 게 아니고 정부에서 1961년 12월부터 음성 나환자를 집단 수용해 생계유지를 할 수 있도록 일정지역을 정한 곳으로 신씨는 그곳이 개발 제한구역으로 지정돼서 옛 자취가 남아있으니 마을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내리면 된다고 했다.
지금은 열악한 중소기업체들이 상주하고 있고, 곧 도시 자연공원인 백마공원이 조성 중으로 각종 운동시설과 휴식시설 등이 형성된다.
옛 노인들은 지금도 청천동을 마제이(馬場))라 부른다. 마장(馬場))면소가 있어 마장을 ‘마제이’로 변화된 이름을 지금도 불러오고 있다.
마장(馬場)이란 지명이 생긴 것은 효성동, 청천동, 산곡동 그 일대의 벌판을 ‘마장뜰’이라 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마장뜰’ 역시 말을 사육했던 마장(馬場, 牧場)이였기에 붙여진 땅이름이다.
이곳은 수원이 부족하여 농경에 부적당하며 말먹이로 좋은 억새풀로 뒤덮여 새벌이(효성동) 마을이름이 생겼듯이 억새풀 벌판이니 말 목장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곳의 ‘마장뜰’은 고려 때의 목장이라고 구전되고 있으며 역시 방목에는 적당하지 않으나 세종실록에 있는 경기도 26개소의 마장에 속했던 것으로 믿어지며 목장이 있었기에 ‘마장뜰’, ‘마장면’이 생기게 되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부평4공단 60∼70년대 주축
그 많던 여공들은 다 어디로?
청천2동

과거를 말하자면 청천 1동과 2동은 나눠 말 할 수 없다. 90년도까지는 동이 하나였으므로, 굳이 떨어뜨려 특징을 내자면 1동은 거의 주거지역이었고 2동은 부평 4공단이 들어서면서 준 공업지대였다. 면적이 타동에 비해 넓은 편이며 구청 앞 세림병원까지가 청천2동이다.
향토사학자의 자료를 훑어보지 않고는 개인의 견해로 역사나 유래를 건너 집어 논 할 수 없기에 기자가 다루는 동네이야기는 그저 근거한 자료를 바탕으로 주민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고향이야기, 동네의 발전상, 이웃들의 삶을 다루는 것이다.
구전을 듣기 위해 7~80세 된 어르신을 만나기도 하고 젊지만 동 일에 앞장서는 일꾼을 만나 지도를 펼치기도 한다.
이건국(60.민간사회안전망위원회장)씨는 청천동 45년 지기. “1동 쪽에는 좁은 가옥이 몰려있었고 직장 따라 온 외지사람들도 상당수 있었지요. 2동은 공장지대였으니, 토지계획이 다 되어있어 공중에서 보면 바둑판처럼 반듯반듯하게 잘라져 있죠. 경기가 침체돼서 공단이 울상입니다. 상가나 단독주택들도 빈방이 남아돌고... 70년대 그 많던 여공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웃음). 시골에서 올라온 순진하고 예쁜 아가씨들이 워낙 많았으니까요. 특히 반도가발공장은 여공들이 몇 천 명이었고 섬유, 봉재, 대한마이크로 회사들도 거의 여직원이 많았는데, 지금은 5공단과 남동공단이 생기면서 그 수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청천2동은 북부에 입지한 수출공단 4단지로 경인공업지대의 중추적 역할을 하며 전자, 섬유, 기계, 금속, 식료품, 자동차공업 등이 활발했다.
청천동 하면 대우자동차를 떠올린다. 그만큼 지역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다.
63년도에 새나라 자동차가 생겨났고 신진-새한-대우-GM대우로 회사가 바뀌었다.
다들 양은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던 시절 인천시내에서 처음으로 구내식당에서 밥을 주던 곳. 처음으로 통근버스를 운행했던 곳... 그래서 자동차회사 다닌다고 하면 서슴없이 외상을 그어 주던 시절이 있었다. 돈을 갈퀴로 긁어모은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로 부자회사였다.
이건국씨는 66년 20대 초반 새나라자동차 직원이었는데 그 당시 수작업 하던 시절이라 자동차를 하루 1대 만들었다고 회상한다.
허허벌판 부평평야가 사라지고 수출4공단이 들어서면서 공장의 기계소리가 부평경제를 활성화 시켰다. 그 산업역군들에게 갈채를 보낸다.

<조은숙 기자> eyagi9090@yahoo.co.kr


3개의 야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후정마을에는 우물 또한 3개가
삼산동

면적 3.08㎢ 인구 64,412의 삼산동은 원래 부평군 부내면 ‘후정리'였는데, 1940년 인천부에 편입되면서 ‘삼립정'이 되었다가 해방 후 1946년에 동 개정으로 ‘삼산동(三山洞)'이 되었다. 나지막한 야산인 도당산, 건원산, 간재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분지가 삼산동 마을의 시작이었다. 처음에 후정리라고 한 것은 인구가 많았던 갈산의 뒤에 있는 우물이 있는 마을이라 그렇게 불려졌다. 후정마을엔 우물이 세 개 있었는데, 첫 우물은 도당산에 있던 자생한 우물로 현재 엠코아파트가 건설 중이라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두 번째 만들어졌으며 세 우물 중 가장 컸던 간재산 옆 우물위에 올려졌던 사각바위를 삼산동 노인정 앞에 이전보관하고 있다. 돌의 크기나 견고함으로 보아 상당히 큰 우물이었음이 짐작된다. 전기동(75) 삼산동 노인정회장은 “건원산는 천주교회 부근이고, 도당산은 예전 코리아스파이스 자리(현 엠코아파트 현장)였으며, 간재산은 대보아파트 즉 동사무소 부근임이 분명하다”고 증언한다.
“삼산동에 있는 세 개의 산은 모양이 꼭 갓을 쓰고 있는 듯했고 농수로와 그 거리가 얼마나 일정했는지 측량을 한 듯 했다우” 신현길(88)선생은 조상대대로 이곳에 살면서 삼산동에 잘못 알려진 역사가 많아 안타까웠다고 말문을 연다. “한 가지 더 안타까운 점은 공원이름들이 제 위치를 찾지 못한 점이지” 다시 운을 뗀 할아버지는 현재 영성공원자리는 어처구니없다고 이야기 한다. 예전 염씨와 성씨 일가가 마을을 이루고 살았던 곳은 현재 농산물시장 앞 부근(현 삼산무지개아파트)이라고 한다. 이곳에 작은 공원이 있는데 그곳 이름을 ‘염성공원’이라 해야 옳은 것 아니냐고 지적한다. 옛 모든 고지도에는 1백m의 예쁘고 작은 염성산(廉成山)으로 나와 있으나, 1899년 발행된「부평군읍지」의 기록을 보면 영성산(靈成山)으로 나오니 이는 ‘신통하게 이루어졌다'고 염(廉)자를 령(靈)자로 바꾸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분지모양을 한 삼산동은 드나드는 길도 정확히 5곳을 만들어 농사에 방해되지 않도록 했다. 그러다보니 논농사위주의 생활에서 두레패가 생겨나게 되었다. 120년 가까운 역사를 지닌 삼산동 풍물은 서로 농사를 도와주기위한 두레모임에서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115년 전에 사용한 풍물 깃봉이 노인정에 보관되어 역사를 현실로 받아들이게 한다. 조만간 분동을 앞두고 있는 삼산동은 일반녹지, 생산녹지, 준공업지역등이 혼재된 도·농 복합지역으로 굴포천을 통과하고 있으며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만들어져 인구유입이 가장 많을 것으로 예상한다.


정수장 자리에 있던 야산 ‘갈산’
흙 헐어낸 평지 새갈마을 형성
갈산1동

면적 1.11㎢ 인구 19,783명의 갈산1동은 한 말에 부평군 서면 갈우(葛隅)마을로 부천군이 되면서 부천군 부내면 갈월리가 되었던 곳이 1940년 인천부에 편입되면서 해방 후 갈산동이 되었다.
갈산동은 우리말로 ‘새갈’로 불려졌으며, 정수사업소 동쪽에 위치한 마을을 지칭했다. 정수장 자리는 갈산이란 야산이 있었으며, ‘공마당’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국방도로를 1943년경 건설하면서 흙이 부족하자 갈산의 흙을 헐어다 썼다.
이 토취장 자리가 천 여평의 평지를 이루며 새갈마을이 형성되었다. 갈산에 비추는 밝은 달의 야경이 장관을 이뤄 한때 갈월리로 불리기도 했다. 갈산명월이라 한 것을 요약해 불려지기 시작한 이름이다. 공터자리엔 고사포진지가 있었는데 후에(80년경) 100세대 가량의 희복주택이 들어서며 공마당은 이름만 남아 있다.
현재 부평북초등학교가 있는 자리엔 조선시대 효자 이찰·이율 형제의 효를 기리는 효자정려문이 있었다. 10대손 이종성(61,갈산1동)씨는 세종대왕의 넷째아들 임영대군의 후손으로 이씨문중이 300년 가까이 갈산1동을 벗어나지 않고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고 전한다.
정려각은 1968년까지 갈월감리교회 아래에 있었으나, 학교 신축관계로 계양구 갈현동에 있는 선영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2001년 원래 자리인 두 형제의 묘소가 있는 갈산1동으로 옮기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 채 2004년 4월 인천시로부터 기념물 제52호로 지정되어 계양구에 눌러 앉게 되었다.
“당시 계양구 갈현동으로 옮길 때 종친에서 우마차를 이용해 직접 복원하기까지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부평구에 돌아오지 못하는 문화재에 대해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않느냐는 후손의 말을 들으며, 부평구민들이 좀더 관심을 가졌어야 하지 않나 하는 후회가 깊이 들었다.
외딴 새 동네였던 새갈도 이제는 사통팔달된 도로망 속에 새로운 갈산동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곳에는 부평변전소, 상수도정수장, 이마트 등이 있어 명실공히 부평의 젖줄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예전에는 90% 이상 농경지
사근다리 부근 20가구 거주
갈산2동
“갈산 2동(면적 0.66㎢, 인구 26,355)은 92% 정도가 논이었죠. 흔적이라면 사근다리가 있을 뿐이었어요. 부근엔 도살장도 있었고 몇 세대 주민이 전부였습니다.” 십정동으로 가기 전 도살장이 이곳에 있었음은 뜻밖이었다.
동남아파트 뒤에 있는 사근다리부근에 20채가 안되는 주택이 전부였던 갈산2동. 농수로와 청천천, 굴포천이 만나는 곳에 있는 사근다리는 원래 나무로 만든 다리가 워낙 낡다보니 삭은다리에서 사근다리로 와전되어 불려졌다.
82년도에 토지개발공사가 땅을 매입하며 현재의 모습으로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었다. 당시 사근다리가 낡았다는 이유로 사라졌으나, 2002년 역사를 찾고자 하는 주민들에 의해 복원되었다.
다리아래 흐르는 굴포천은 모양만을 보면 부드러운 굴곡을 이루며 아파트 숲을 가로질러 길게 누운 모습이 아름답고 여유롭기까지 하다.
예전 굴포천에선 겨울이면 김포공항까지 썰매를 탈 수 있게 얼어주었고, 여름이면 물고기를 잡고 아이들이 수영을 하던 놀이공간이었다.
그런데 이상한건 60년경에도 굴포천 물고기에서 석유냄새가 나서 먹을 수가 없게 되었다고 한다.
오폐수로 오염된 굴포천은 ‘굴포천을 살리자’는 시민모임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어 희망을 안겨주고 있다.
굴포천은 치료를 해야 하는 하천이지만 그나마 흐르지도 못하게 된다면 더 큰 문제를 해결하기 힘들 것이라 그는 말한다.
갈산2동엔 여성문화회관과 부평세관, 우림라이온스밸리가 있어 빠른 변화를 이루고 있다.

목록

자료관리 담당자

  • 담당부서 : 홍보담당관
  • 담당팀 : 홍보팀
  • 전화 : 032-509-6390

만족도 평가

결과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