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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서 해 주세요” 하던 옛말 추억속으로 가고

-바리캉, 피대의 기억만 자취로 남아… 이발소의 희노애락-

2010-03-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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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서 해 주세요” 하던 옛말 추억속으로 가고

속칭 ‘다다구미’(지금의 동아아파트 입구에서 북인천 우체국까지 일본인 토건업자가 자리잡아 준 마을) 안에 자리 잡은 ‘고려이발관’은 50년 역사에 걸맞게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자잘한 타일이 붙어있는 세면대며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실내를 담고 싶었지만 주인장은 끝내 거절했다. ‘해 놓은 것도 없고, 돈도 못 벌었고, 부끄럽다’는 게 이유다.
취재가 어렵기는 다른 곳도 마찬가지였다. “한때 이발소=퇴폐영업소로 인식되던 시절에는 얼굴이 뜨거워 내놓고 얘기하기가 창피했다”고 이발경력 46년차 강봉식 이발사(62, 청천동 남영이발관)는 털어 놓는다. 수입이 적어 더 이상 배우겠다는 사람이 없다보니 사양길에 접어들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정월영 이발사(64, 산곡1동 뉴대우이발관)도 입을 모은다.
5년 전 300개 정도였던 부평관내 이발소 수는 현재 170개 정도로 절반가량 줄었다.
흑백의 사진과 빛바랜 풍경화가 걸려있던 어릴 적 이발소가 떠오른다. 키 작은 아이들을 위해 의자 위에 올려 키높이 역할을 해주던 판자. 소설 주인공 몽실이처럼 뒷머리를 쳐올려 단발로 깎아주던 바리캉의 사각거림. 손잡이 달린 면도칼을 처억처억 소리내며 갈던 피대. 두 볼을 꽉 움켜잡은 채 앞머리를 잘라주던 이발사 아저씨의 두툼했던 손.그러나 이제는 없다. 살이 집혀 비명을 지르게 했던 수동바리캉 대신 전기바리캉과 가위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행정관청 지침에 따라 1회용 칼날이 사용되다보니 면도칼을 갈던 숯돌 이며 피대는 무용지물이 됐다.
뜨거운 물에 삶아주던 면도용 타올은 전기온장고가 대신했다. “알아서 해 준다. 편안하다.”고 말하는 남영이발관 10년 단골 김영주(청천동)씨. 이런 변모는 튀는 개성에 죽고 못 사는 젊은이들에겐 도저히 풀기 어려운 영원한 숙제가 아닐 수 없다.
이현숙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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