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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보 승용차를 상상하며

  • 작성자
    관리자(부평의제21실천협의회)
    작성일
    2006년 5월 30일(화)
  • 조회수
    580
‘도어 투 도어’ 기동성과 편리함은
이제 한계효용에 다다르고 있다
교통사고·도로·주차장·에너지·공해…
느림과 빠름·불편과 안락 사이의
조화를 어떻게 꾀할 것인가
보행의 느림을 배려할 여유가 깃들길

 

생활속의 문화사회학

 













▲ 김찬호/한양대 강의교수·문화인류학과














[관련기사]
















“1896년 8월17일, 브리짓 드리스콜은 44살에 자동차에 치여 죽은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자신의 딸과 함께 춤 공연을 보기 위해 런던에 온 드리스콜은 크리스털 팰리스 앞뜰에 서 있다가 대중에게 시범운행을 보이고 있던 자동차에 치였다. 차는 시속 6.5㎞로 달리고 있었고, 그 충격은 치명적이었다. 검시관은 사고사라고 판결하면서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사고는 계속되었다.” (제시카 윌리엄스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그러나 잘 알지 못했던 세상의 몇 가지 사실들> 중에서)

요즘 나오는 웬만한 승용차의 성능은 100마력(馬力) 이상이다. 심지어 500마력이 넘는 것도 많다. 그러한 기동력을 조선시대에 실현한다고 가정해보자. 몇 백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들이 거리를 질주한다고 상상해보자. 도대체 도로가 얼마나 넓어야 할까. 공공장소나 각 가정에 마련되는 ‘주차 공간’, 그리고 그 말들을 먹이고 돌보는 일은 또한 어떨까. 역사상 어느 최고 권력자도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에너지를 향유하지 못했다. 수십 명 노예들의 시중을 받던 로마의 귀족들도 그 점에서는 지금의 보통 사람들보다 빈궁했다.

한국에 자동차가 출현한 지도 100여년, 이제 승용차 1000만대 (일반 차량을 모두 합치면 1500만대)의 시대를 맞았다. 경제성장과 함께 꾸준히 증가해온 자동차는 이제 생계에서 일상 용무뿐만 아니라 순전한 레저용으로까지 그 쓰임새가 넓어지고 있다. 자동차의 매력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출발지와 목적지를 정확하게 이어주는 섬세한 기동성에 있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생활이 다양해지면서 자동차는 분신처럼 여겨진다. 좋은 자동차는 선망의 대상이다. 자동차 회사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제품으로 소비자들에게 손짓한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편리한 기능, 튼튼한 차체, 확실한 안전장치, 경제적인 연비, 매끈한 가속, 쾌적한 승차감 등이다.

한편 자동차는 문화적인 측면이 매우 중요하다. 디자인과 모델명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자동차 회사마다 수 백 개의 이름을 미리 등록해놓는다. 그 이름들은 별, 동물, 지명, 신화, 미술이나 음악 용어 등에서 따오며, 그 어원은 영어, 불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그리스어, 라틴어다. 간혹 한국어도 있었는데, ‘새나라’, ‘누비라’, ‘맵시’, 회사가 퇴출되면서 출시되지 못한 ‘야무진’ 등이 그것이다. 자동차의 이름은 그 언어적 뉘앙스로 상품의 이미지를 채색한다. 중형차의 경우 ‘캐피탈’, ‘포텐샤’, ‘다이내스티’ 처럼 남성적 중후함을 풍기는 반면, 소형으로 갈수록 ‘세피아’, ‘비토스’, ‘라노스’처럼 경쾌한 이름이 붙는다. 그리고 스포츠카(SUV)는 ‘짚 캠퍼스’, ‘프리스타일’, ‘뉴 랙스턴 마이너 체인지’처럼 역동적인 젊음의 뉘앙스가 강하게 깔린다.

소비사회의 상품 체계가 그러하듯 자동차 역시 사회적 의미로 소통된다. 요즘 유행하는 어느 광고를 보자. ‘많이 변한 당신, 멋지게 사셨군요’ 어느 빌딩의 회전문에서 오랜 만에 옛 연인과 우연히 마주친 중년 여성이 중형차를 타고 사라지는 상대방의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하는 말이다. 그에 이어서 ‘누리고 싶은 특별함’이라는 나레이션이 나온다. 그 특별함을 위해 어떤 자동차 회사는 자사의 고급 승용차를 탄 고객에게 호텔에서 특별한 주차나 공항에서 특급 의전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러한 상징 효과는 체면의식과 맞물려 자동차가 신분이나 위세를 과시하는 수단이 된다. 지자체의 빠듯한 살림에도 중형차를 고집하는 단체장들, 명절 때 큰 차를 몰고 고향에 가려고 무리하는 가장(家長)들 (이른바 ‘금의환향 콤플렉스’)에게서 그것을 본다.

그러한 외면적 과시 말고도 승용차가 주는 심리적 만족감이 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자유가 아닐까 싶다. 마음대로 행선지를 정하고 속도를 조절하면서 시공간을 장악하는 쾌감 말이다. 출근 시간대에 70%나 되는 나 홀로 운전 차량들, 곳곳이 막히는데도 굳이 차를 끌고 나오는 이유가 거기에 있지 않을까. 복잡하고 치열한 세상에서 자신의 뜻대로 되는 것은 별로 없다. 그런데 운전대를 잡으면 뭔가 상황을 제어하는 듯하다. 그러한 통제감으로 자아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온전히 혼자 있을 수 있는 차내 공간 그 자체가 주는 자족감도 크다. 직장이나 가정에서 겪는 참견이나 눈치에서 벗어나 마음껏 음악도 듣고 담배도 피울 수 있는 그 곳은 오붓한 휴게실이다.


하지만 그런 안락함과는 상반되게 운전자의 마음은 날카로워질 때가 많다. 앞차가 조금만 지체해도 안달하고, 다른 운전자들의 사소한 실수에 신경질을 낸다. 평소에는 점잖은 사람이 운전대만 잡으면 험한 욕을 내뱉는 경우가 많다. 차를 운전한다는 것은 그만큼 신경이 뾰족하게 곤두서고 많은 정신 에너지가 소모되는 노동인 것이다. 그렇듯 우리는 개인적 차원에서 자동차의 편리함과 즐거움을 점점 더 추구하지만, 사회적 차원에서 치르는 비효율과 심리적 엔트로피의 비용이 매우 높다. ‘주고받고 통하는’(交通) 마음의 회로망을 도로에 어떻게 병설할 것인가. 자동차라는 사유물을 도로라는 공유공간에서 다루는 양식은 무엇인가.

“나는 미래를 기다린 적이 없다. 나는 언제나 그 시대의 미래였다.(Always ahead)” 어느 중형차의 광고 문구다. 날로 고성능으로 무장하는 자동차와 함께 우리의 시간 감각은 ‘매우 빠르게’(프레스토) 모드로 변용되고 있다. 속도와 과시에 대한 중독은 점점 깊어진다. 이동 그 자체를 느긋하게 음미하는 여유가 도로에 깃든다면 그곳은 한결 유쾌한 교통 공간이 되지 않을까. 소형차 한 대로 10년 이상 버티는 운전자, 다른 차량들에 길을 내주며 흐뭇해하는 버스기사, 대중교통과 자전거와 보행을 즐기는 많은 시민들이 그곳에 있다. 언젠가 거기에 ‘라르고’라는 이름의 승용차가 등장하는 것을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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