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전자 품은 길거리
▲ 김찬호/한양대 강의교수·문화인류학과 |
|
“힙합이 처음 등장했을 때, 길거리에서 어슬렁거리는 젊은이들의 어투가 그대로 배어 있었어요. 힙합을 들으면서 우리는 살아갈 힘을 얻었습니다. 총에 맞거나 칼에 찔리거나 하는 일 없이 즐겁게 흑인들끼리의 파티를 즐기고 싶었지요.”
빈민가 출신의 R&B(아르앤비) 가수로서 미국 흑인 여성 음악의 정상에 우뚝 선 메리 J. 브라이지의 말이다.
백인 팝을 멋지게 소화해낸 휘트니 휴스턴에 대해 흑인들이 싫증을 낼 무렵, 그는 힘없고 가난한 이들의 애환을 대변하는 목소리로 소울 음악의 혼을 부활시켰다고 평가받는다.
그의 음악적 뿌리는 힙합이다. 그 꾸밈없는 표현에 멜로디를 가미함으로써 그는 길거리 음악을 빌보드 차트 정상에까지 끌어올렸다.
가난한 흑인 젊은이들에게 길거리는 범죄와 타락의 온상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불행한 가정과 암울한 현실을 딛고 삶의 기력을 회복하면서 인생의 가능성을 찾는 장소이기도 하다. 마이클 조단이 농구와 처음 인연을 맺은 곳도 바로 길거리였다.
아이들은 자라나면서 가정에서 벗어나 골목길에서 또래 집단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형성한다. 거기에서 다양한 놀이를 체득하고 남자 아이들은 ‘골목대장’을 통해 권력 관계를 경험한다. 지금은 많이 사라지고 있지만, 아이들에게 골목길은 사회를 만들고 배우는 터전이었다.
어른이 되면서 점점 더 크고 복잡한 도로를 자주 접하게 된다. 길거리는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 사이에 있는 제3의 공간, 업무와 일상의 굴레에서 풀려나는 완충지대다. 직장이나 학교에서 보람을 찾지 못하고 가정에서도 깊은 친밀감을 나누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길거리가 오히려 편안한 해방구가 될 수 있다.
윗사람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고 공부의 압박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는 그 공간은 일종의 안식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길거리에 나앉다’, ‘노숙자’ 같은 표현에서처럼 삶터를 잃고 정처 없이 떠도는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길거리를 ‘배회’한다는 것은 고단한 ‘방황’일 수도 있고, 유쾌한 ‘방랑’일 수도 있다.
한국 도시의 길거리는 유난히 북적대는 편이다. 그리고 밤 늦게 까지 시끌벅적하다. 야근 후에 한 잔 하는 샐러리맨, 심야 데이트족들의 행렬 등으로 환하게 붐빈다. 그리고 각종 서비스업도 꽤 늦은 시간까지 영업을 하고, 노점상들은 더 깊은 밤까지 불을 밝힌다.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들은 그러한 거리의 활력에 끌리게 된다고 한다. 빠른 걸음걸이와 박진감 넘치는 도시의 모습에 깊은 인상을 갖는 것이다.
그런데 과거 군사정권 시절 한국의 길거리는 정치적 긴장으로 경직되어 있었다. ‘가두(街頭) 시위’를 통해 정부나 체제에 대한 불만이 표출되고 때로 정권이 교체되기도 했다. 그래서 독재자들은 그곳을 삼엄하게 경비했다. 불심 검문을 행하고 유사시에는 통행을 금지시키기도 했다. 또한 젊은이들의 분방한 외모도 풍기문란이라는 이름으로 단속되고, 어슬렁거리는 청소년들은 감시와 규제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그 칙칙한 역사를 지나 한국은 곧바로 고감도 소비사회로 진입하였다.
이제 번화가는 그 자체가 거대한 구경거리이다. 오가는 사람들은 그것을 매개로 간접적인 소통을 하면서 욕망을 환기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행인들 사이에는 농밀한 시선의 상호작용이 이뤄진다.
자신이 불특정 다수의 타자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치는가에 지극히 신경 쓰면서도, 동시에 거기에 전혀 연연해하지 않는 듯한 모습을 연출한다.
번화가는 그런 마네킹들이 행진하는 패션쇼 무대다. 뽐내는 몸짓과 부러워하는 눈빛이 복잡하게 교차하는 이미지의 경연장이다. 젊은이들은 정치적으로는 풀려났지만, 복잡다기한 기호의 그물망에 매이게 된 듯하다.
하지만 길거리에는 자생적인 문화 잠재력이 숨어 있다.
거기에서는 우연한 만남과 즉흥적인 해프닝을 통해서도 창조적인 마음의 시너지가 일어날 수 있다.
2002년 월드컵 길거리 응원의 신화는 바로 그 폭발적 에너지를 만끽한 경험이었다. 그 멋진 광기의 정체는 무엇이었는가.
무연(無緣)의 군중이 뜨거운 동포로 환생하면서 터뜨린 희열이었다. 한편으로 권위주의와 위계서열 속에서 경직되었고, 다른 한편으로 비교와 과시에 대한 강박증으로 어색하게 꼬여 있는 몸의 해방이었다.
그렇듯 거창한 이벤트가 아니더라도 이따금 거리에는 광장이 탄생한다.
거리의 악사가 멋진 연주를 하면 행인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어 객석을 만들어내는가 하면, 어떤 우발적인 광경 앞에서 군중 심리로 한 순간 일심동체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최근에는 아예 지자체가 ‘걷고 싶은 거리’나 ‘문화의 광장’ 등을 조성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곳에서 청소년 어울 마당이나 댄스 경연대회, 길거리 농구대회 같은 프로그램이 운영되기도 한다. 이 때 길거리는 잠시 머물고 싶은 공간으로 바뀐다.
젊은이들은 단순히 소비의 객체로만 머물고 싶어 하지 않는다. 비슷한 생활 감정과 언어를 공유하는 이들이 때를 맞춰 일정한 거리에 모여 특유한 문화를 생산해내는 지역의 사례는 많이 있다. 상품 스펙터클에 대한 매료 보다 진한 감흥, 과시와 선망의 시선을 넘어서는 생기가 거기에 있다. 저마다 종종 걸음으로 엇갈리고 흘낏 훑어보며 지나치는 단절 속에서 놀이와 재미의 틈새를 열어가는 것이다.
길거리는 언제나 표현과 소통의 공간일 수 있다.
황량한 빈민가에서 힙합이 태동하였듯이, 삭막한 도시에서도 젊은이들은 다양한 멋과 스타일을 창출해 간다.
거리는 그 미디어가 될 수 있다. 길거리는 비일상의 즐거움을 잉태하는 일상 공간, 질서와 무질서가 맞물리면서 도시문화를 빚어내는 그릇이 될 수 있다.
거기에서 출렁이는 인파는 저마다 삶의 빛깔을 랩으로 읊으며 화음을 울리고 싶다. 경쾌한 발걸음의 율동으로 어울리고 싶다.
자료관리 담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