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유동인구가 많지 않고, 거리가 조성된 지 10년 가까이 된 터라 첫 인상은 깔끔하지 않지만 ‘부평 문화의 거리’에 가면 걷고 싶은 거리로 만들려는 투사(?)들을 만날 수 있다.
이곳의 입지조건은 인근에 부평역사 롯데마트, 롯데백화점에다 규모로는 국내 최대인 지하상가가 있으며, 인천 최대의 지상 트렌드 몰 중 하나인 부평패션 1번가가 인접해 있어 마산 오동동, 창원 중앙동 오거리 일대보다 더 취약해 비교해볼 만하다.
사람보다 차 ‘뒤바뀐 계급’
△ 최악의 상권부지, 거리를 관리하며 지켜내라 = 인천시 부평구 부평동 199번지 일대의 부평 재래시장. 길이 270m, 폭 16m인 이곳에 지난 1996년 7월부터 ‘문화의 거리’조성을 위한 진정서가 부평구청에 접수된다. 인천 내에서도 신흥 시가지였던 이곳은 1990년 초까지 불황을 몰랐다. 1990년 초가 지나면서 인근에 대규모 백화점과 대형 할인매장이 들어서고, 부평 역 지하상가가 갈수록 대형화되면서 상권이 위기에 처한다. 이런 상황에서 젊은 상인들이 중심이 돼 거리조성을 위해 구청에 일곱 차례나 진정서를 넣었다. 하지만 100여 개가 넘는 노점상들의 생계대책을 들어 구청은 거리조성에 유보적이었다.
상인들 상권살리려 추진위 꾸려
이곳 상인들은 노점상들의 소득세와 재산보유 현황을 파악한 뒤 노점상 연합회와 상의 끝에 노점상 이외 별도 소득이 있는 자들과 빌딩을 소유하고 있는 등 재산이 많은 노점상 50여 명을 추려내 기존의 절반정도만 영업을 하도록 합의한다. 1998년 3월 차 없는 거리는 이렇게 조성된다.
조성 첫 해는 노점을 제외하곤 자기 상점 앞에 물건진열대도 놓지 않고, 차를 주차하지도 않아 비교적 거리가 깨끗하게 유지되었지만 1년이 지난 후 거리는 쓰레기와 상인들의 주차, 인근 부평 패션 1번가에서 유입되는 차량으로 거리는 다시 엉망이었다.
이 때부터 건물주가 중심이던 상인연합회보다는 임차상인이 함께 조직돼 있는 ‘부평 문화의 거리 발전추진위원회’(이하 문발추)가 구체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현재 문발추 부위원장이자 초대 사무국장이었던 인태연씨는 “다시 상인들을 만나 거리를 살려야한다고 호소했죠. 그런데 뭘 하나 하려고 해도 구청은 거리조성했다고 손놓지, 노점상들은 음악 하나만 틀어도 장사에 방해가 된다고 난리지 참 힘들었죠”라고 회상한다. 그러나 문발추는 포기하지 않았다.
점포 앞 진열대 치우기 등 동참
△ 거리에도 계급은 있다 = 차량우선 정책으로 이미 거리는 ‘일등 차량’에다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다녀야 하는 ‘이등 사람’으로 나눠져 있다. 조그만 공간만 있어도 사람이 아닌 차가 점유해 버린다. 거리는 사람들에게 쉴 공간조차 되지 않는다. 이런 고민을 한 문발추 회원들은 서서히 싸움닭이 되어간다.
< P > 구청이 하지 않으면 그들이 돈을 냈다. 6000만원 가까운 자비로 거리 중간에 분수대를 놓고, 거리 전체에 소형 스피커 20대를 설치했다. 한 마트의 주인은 이 분수대를 7년 동안 책임지고 청소하고 있어 놀랍기도 하다. 처음 음악을 틀었을 때는 노점상들은 장사에 방해가 된다고 스피커 줄을 끊기도 했지만 6년 전부터 오전 10시부터 오후 10시30분까지 매일 음악이 흘러나온다.
노점이 빠져나간 공간에는 다시 차량이나 노점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해 그다지 볼품은 없지만 자비를 들인 벤치를 놓았다. 여기에다 최근에는 구청예산과 상인들의 돈을 합쳐 조그만 공연장 겸 영화상영시설을 2곳 설치했다.
집행부 상시로 만나 발전 모색
이곳에서 올 5월부터 매주 금~일요일 오후 8시에 지역케이블 TV의 협조를 받아 영화를 상영하고, 최근에는 인천 힙합 동호회원들이 매월 넷째 주 토요일 오후 7시에 힙합공연을 한다. 구청에서도 한 달에 한번 록밴드 공연을 지원하고.
이렇게 거리를 지키고 있는 문발추는 1년에 1회씩 정기총회, 분기별 3차례 모임을 한다. 10명으로 꾸려진 집행부는 상시적으로 만나며, 거리를 4개 블록으로 나누고, 각 블록에 블록장을 둬 이들이 책임지고 회비를 걷고, 또 집행부회의 내용을 회원들에게 알린다.
음악이나 영화상영 등 각종 행사책임을 맡고 있는 문발추 원선규 부위원장은 “이건 미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힘들죠. 하지만 이 짓(?)이 시민들에겐 걷고 싶은 거리를, 상인들에겐 장사할 만한 곳으로 만들어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이 기획취재는 문화관광부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전국 지역신문 종합평가 결과 경남도민일보가 우선지원대상 신문사로 선정됨에 따라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아 이뤄졌습니다.
인태연 부평 문화의 거리 발전추진위 부위원장 “거리의 공공성 인식이 시민과 상인 모두 살려” -부평문화의 거리는 처음 어떻게 조성되었는가.
△1996년 처음 거리를 조성할 때는 부평시장 건물주들이 중심이었다. 지금처럼 ‘문화의 거리’를 조성하겠다는 의지보다는 도로포장과 거리정비가 제대로 되면 땅값이 오를 것이라는 생각이 우선이었다. 처음 세입자들(임대 상인들)이 함께 하지 않았지만 그들도 거리가 새롭게 조성되면 아무래도 사람들이 많이 찾겠다고 생각해 동의했다. 나를 포함한 일부 상인들은 시민의 공공 공간을 확보해서 상권이 거듭나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이 세 입장이 서로 맞아떨어진 거다.
-상가번영회와 문화의 거리발전추진위원회는 별도 조직인가.
△‘부평문화의 거리’는 먼저 건물주 모임인 상가번영회에서 시작해 이를 확대 발전시킨 상인조직(여기에는 건물주도 있고, 순수 임차인들도 있다)인 ‘부평 문화의 거리 발전추진 위원회’(이하 문발추)가 함께 일을 추진했다. 현재는 거리를 유지·관리하고, 각종 행사를 주도하는 조직은 문발추며 상가번영회는 이를 후원한다. 특징적으로 이 곳 ‘문화의 거리’는 다른 거리와 달리 행정 주도적이지 않고 상인, 곧 주민이 중심이 되었다는 점이고, 그나마 다른 곳 상인들보다는 제 앞 이익보다 거리의 공공성을 인정한다는 점이 다르다. 구청은 처음 이 곳을 골치 아픈 동네로 인식했다. 최초 거리조성을 제의하고 상인들 스스로 돈을 내 분수대와 벤치를 설치하고, 이걸 상인들에게 의견을 구하고 직접 돈을 걷어 설치했다.
-노점과의 갈등이 있다고 들었다. 갈등의 내용은 뭐였나.
△우리가 거리조성을 위한 청원서를 냈을 때 부평구청은 100여 개에 이르는 노점상 처리문제로 유보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래서 우리는 이곳 노점상연합회와 이틀에 걸쳐 간담회를 열었다. 처음 문화의 거리가 탄생했을 때 기업형, 소득이 높은 노점상들을 추려 50여 개 노점이 다시 들어오도록 했다. 막상 일을 추진해보니까 노점문제는 정말 심각했다. 모든 노점상들이 생활형편이 어려워 생계형 영업을 한다고 보면 너무 순진한 거다. 우리는 이들의 소득세와 재산보유 현황을 파악했다. 자신의 빌딩이 있는 노점상도 있었다. 이들에게 ‘노점설치규격을 지켜달라, 영업시간 외 노점은 다른 공간으로 이동 보관해야한다, 그리고 불법적인 점유권은 인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특히 마지막은 결코 인정할 수 없다. 우리가 이 거리를 새롭게 만든다는 것은 단지 차가 다니지 않고, 거리가 조금 깨끗하다는 것이 아니다. 거리는 상인들만의 것도 아니고 시민들의 것이다. 거리를 자신들이 사유화해 권리금을 걸어 사고 판다? 거리의 공공성을 지키기 위해서도 이건 원천적으로 막아야한다. 그래도 약 9년이란 시간이 흐르고 나니까 권리금 매매는 사라졌다. 노점상은 거리 조성 초기 54개에서 지금은 30개 이하로 남아있다.
-‘문화의 거리’를 조성하려는 상인들, 혹은 행정가들에게 하고픈 말은?
△상가 주변을 망치는 이들 대부분은 상인들이다. 나는 문화의 거리를 조성하려는 재래상권, 재래시장 상인들에게 ‘당신들 상점 앞, 차부터 치워라’라고 말하고 싶다. 한 달에 주차료 십여 만원이 아까워 시민들과 고객들이 제대로 걸을 수 없게 해놓고, 매상을 올리겠다? 이건 과거에나 있을 법한 거다. 시민들의 보행권을 확보해주고, 시민들이 거리에서 어떤 매력을 느낄 수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이를 위해선 상인으로서의 이해관계도 있지만 그 곳에 사는 주민, 주인이 되어 그 공간에 애정을 가져야 한다. 재래상권은 자본 집중적인 백화정마트·대형지하상가와 직접 경쟁은 불가능하다. 대신 앞으로는 환경 중심적인 공간과 거리가 매력을 가질 것이다. 자본집중화를 할 수 없는 지상상권 상인들은 이걸 알아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