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인점 대공습…무너지는 중소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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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통업체 1개 생길때 재래상가 수백개 와르르
“시방, 오늘이 5일장인디 점심 먹도록 개시도 못했어.” 순천 북부시장에서 과일 가게와 폐지 수집으로 생계를 잇는 정명환(가명·60)씨. 그에게 ‘할인점’ ‘대형 유통점’은 고통의 시작이었다.
20일 오후 1시 전남 순천시 북부시장. ‘5일장’이 섰지만 시장은 한산했다. “하루에 2만~3만원 팔기도 힘들어. 작년 7월에 이마트가 들어왔는데, 몇 달 안가 손님이 반토막 나더라고. 요즘엔 그냥 폐지나 줍고 술이나 한잔씩 하는 거지 뭐.”
점심 때 막걸리 한 사발을 걸친 후라 얼굴은 불그레하다. 인구 27만명의 순천시. 킴스클럽·홈플러스·까르푸·이마트 등 대형 할인점만 4개다.
정씨는 5년 전 과일 가게를 시작했다. 까르푸의 뒤를 이어 지난 2004년과 2005년에 홈플러스와 이마트까지 치고 들어오자 과일 가게도 한물갔다. 지난해 10월부터 휴업 상태다. 푼돈이라도 벌려고 폐지 수집에 나섰다. 하루종일 주워도 5000원을 벌기가 힘들다. 이 돈으로는 중학교 2학년짜리 늦둥이 아들 학비조차 댈 수 없다. 같은 날 순천시 중앙동 황금프라자. 2004년 2월에 개봉한 영화 ‘목포는 항구다’ 포스터가 빛 바랜 채 최신 영화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건물은 텅 비었다. 90년대 중반 9층 건물에 300여 개에 이르던 점포는 현재 1층에 10개만 남았다. 월세는 아예 없다. 월 30만원의 전기세만 내면 누구나 장사를 할 수 있다. 그래도 하겠다는 사람이 없다. 잡화상점을 경영하는 이인철(가명·64) 사장은 “순천에는 이런 ‘유령 건물’이 3~4개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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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인점 융단 폭격에 희망 잃은 부산 재래상권
지난 19일 오후 6시30분 부산시 전포동 ‘놀이터’ 골목시장. 때마침 추적추적 내린 가랑비 때문인가. 썰렁하다. A약국 모퉁이의 70대 노인 부부는 아예 판을 걷는다. “아침 9시부터 판 게 2만원입니더. 더 이상 손님 오기를 바랄 수 없지예…. 뭐 그 마튼가(마트인가) 뭔가 하는 곳으로 다 가버렸어예.” 골목길을 따라 30여m 위로 옮겼다. 올해 70세인 김을순(가명) 할머니가 썰렁한 순댓국 가게 안 방문턱에 넋 없이 주저앉아 있다. “주택가가 곁에 있는데도 사람이 안 나와예. 다른 데로 빠지는가, 자꾸 줄어예…”라며 짜증 섞인 말투다.
낮 12시부터 7시간 동안 매상은 제로(0). “염팡(매우) 안 됩니더. 돼지족발·선짓국…. 한 번 끓이고 삶아 놓으면 며칠 갑니더.” 5~6년 전 잘 될 때를 회상하지만 과거일 뿐이다. “다달이 빚진다 안캅니꺼? 500만원 보증금에 달세(월세) 30만원인데, 월 30만원 팔기도 어려워예.” 이 동네 전부 다 세 내놨어예. 골목에 한 시간만 앉아 있어 보이소. 사람 몇 명 다니나?”
90년대 후반부터 인근에 까르푸·밀리오레·이마트 등 대형 유통점이 들어선 뒤 생긴 현상이다.
문현동 쪽으로 10분을 걸었다. 문현 4거리 코너에 ‘문전시장’이라는 시장 간판이 전화번호(8045-1545)와 함께 눈에 띈다. 이곳은 이미 폐쇄 상태. “몇 개 안 남았어예. 생선 가게, 야채점, 기름집, 쌀집…그게 다라예.” 인근 맛나식당 여주인 얘기다. “옛날에 문전시장 하면 알아줬다 아입니꺼. 주변에 학교가 일곱 곳이나 있는데 우째 이리 안되는지…. 까르푸·이마트 있으니, 온 천지 있는 것 다 있으니 그랄 깁니다.” 부산재래시장연합회 김원대 부회장은 “할인점 하나 들어오면 주변은 몰살이라 봐야 한다”고 혀를 찼다.
◆신불자 양산하는 충주 재래상권
충주의 명동 현대타운상가. 이곳에서 700~800m쯤 떨어져 이마트가 떡 버티고 있다. 1989년 12월 문을 연 현대타운상가는 점포 300여 개의 대형 상가였다. 지금은 140여 개만 남았다. “이마트 등 할인점 때문이에요. 임대 상인들은 다 나갔고, 자기 점포 상인들만 악전고투하고 있어요.” 한 상인의 귀띔이다.
충주 무학시장의 김기창씨는 “이마트와 롯데마트는 자동차로 10분 거리인데, 그 사이에 있던 재래시장 네 곳의 1000여 개 점포 중 300여 개가 철시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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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출로 백화점을 추월한 지는 이미 오래다. 인터넷쇼핑몰·편의점 등도 할인점과 비교도 되지 않는다. ‘소비재 가격은 할인점이 정한다’는 말도 이래서 나왔다. 대형 제조업체들도 할인점 앞에선 벌벌 떨고, 유통이 제조업까지 지배하는 시대를 할인점이 이끌어냈다.
1993년 50억원의 매출을 올렸던 할인점은 10년 만인 2003년 매출 19조5000억원으로 무려 4000배 가까이 성장하면서 그해 70년 역사의 백화점을 넘어섰다. 미국·일본 등 유통 선진국들에서는 40~50년 걸린 일을 한국 할인점은 10년 만에 해낸 것이다.
고속 성장의 이면(裏面)엔 짙은 ‘그늘’이 깔렸다. ‘가격 파괴’라는 신조어(新造語)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등장한 할인점은 정면으로 서민경제를 겨냥했다. 고정된 정가(定價)가 있고, 기껏해야 10% 내외의 할인율 적용 이외에는 생각조차 못하던 재래시장과 중·소 상인들은 할인점들이 벌인 ‘유통혁명’ 와중에 대책 없이 무너져 갔다.
이들을 급격한 충격에서 보호할 수 있는 장치는 미약했고, 할인점의 판매 품목이나 출점 제한 등 규제는 거의 없었다. 할인점에는 동물병원까지 들어서고, 보험상품까지 팔고 있다.
서귀포시 한복판에 들어선 홈플러스 매장 2500평을 서귀포시 인구로 나누면 30명당 1평씩 돌아가는 규모다. 서귀포 서쪽 월드컵 경기장 인근에는 이마트가 5~6월쯤 비슷한 규모의 대형매장을 개장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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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마트 양기홍 차장은 “대형할인점은 돈이 들어가면 나오지 않는 블랙홀”이라고 울상을 지었다.
도매상들도 아우성이다. 우유 대리점을 경영하는 김상범(45)씨는 “매출이 40% 줄고 반품도 크게 늘었다”고 했다. “홈플러스 납품가격은 본사끼리 정하기 때문에 마진이 너무 박해요. 그래서 납품을 포기했는데 제 거래선인 동네 가게들이 죽을 지경이니 참 큰일났습니다.” 한 생활용품 대리점 김모 사장은 아예 장사를 포기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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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할인점들은 땅 구하기 어려운 서울·수도권을 피해 지역경제 기반이 취약한 지방, 중소도시로 진격하고 있다.
대표적인 ‘부자 구(區)’인 강남구엔 할인점이 월마트 단 하나뿐이다. 강남구의 인구는 무려 54만명. 반면 인구 27만명의 순천엔 4개의 할인점이 우글거린다. 인구 50만~60만명 수준인 천안·청주엔 역시 5개가 난립했다.
한국수퍼마켓조합연합회 임실근 전무는 “무차별 출점 경쟁을 벌이는 할인점들은 땅값이 싸고 부지 확보가 용이한 지방에 우선 들어가고 본다”면서 “별다른 방어력이 없는 지방 영세상인들이 더 큰 타격을 입고 있어 양극화가 심화된다”고 말했다.
막강한 자금력을 가진 대형할인점들은 지방 도시 한복판에 진출, 상권 전체를 흔들어버린다. 충주시 이마트는 시청 구청사를 사들여 입점했다. 이마트에 이어 롯데마트까지 들어오면서 충주에서는 80여개의 중소 마켓이 문을 닫았다. 충주 수퍼마켓협동조합 음기상 이사장은 “지방 소도시야말로 돈이 돌아야 버티는데 재래시장·수퍼·식당 등 모든 상권이 불황에 시달리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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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대도시도 할인점 폭풍의 예외가 아니다. 인구 360만의 부산에는 할인점 47개가 난립하고 있다. 부산 재래시장연합회 김원대 부회장은 “할인점 하나가 들어올 때마다 재래시장 10~11개가 망한다”고 비판했다.
대구의 경우 1999년 7개에 불과했던 대형 할인점이 지난해 말 20개로 늘었다. 지난 97년 대구지역 소매시장 점유율은 백화점 25%, 소매점 75%였지만 작년에는 백화점과 소매점이 16%와 49.3%로 각각 줄어든 반면 대형 할인점은 34.7%로 늘었다. 대형 할인점은 도매시장도 붕괴시켰다. LG생활건강·애경·대상 등 생활용품·식품을 취급하는 대기업의 대구지역 대리점들은 3년 전만 해도 100개가 넘었지만 지금은 3분의 1도 남지 않았다.
한국유통학회 변명식 회장(장안대 교수)은 “산업의 균형을 생각하지 않고 무차별 출점하고 있는 것이 문제”라며 “이 추세대로라면 1~2년 안에 할인점끼리 먹고 먹히는 유통 대란이 올지 모른다”고 경고했다.
대형할인점 입점 이후 우선 수퍼마켓의 대목이 바뀌었다. 바로 옆 이마트가 휴점하는 날이 수퍼마켓의 대목이다.
“이번 설 연휴에는 이마트가 설 하루는 쉰다고 하네요. 설 선물 준비 못하신 손님들이 그날만큼은 우리 가게를 찾아 주세요. 기껏해야 일년에 3~4일 대목이 있는 셈이지요.” 10여년째 지점장을 맡고 있는 허정봉씨의 푸념이다.
5년 전에는 수퍼마켓에 매장 정리, 배달, 계산대 근무 등 지점장을 포함해 12명이 근무했지만 매상이 줄면서 11명이 퇴직하고 지금은 3명만 남았다. 허씨는 “사장님도 직원 해고만은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매출이 3분의 1로 주는 데 도리가 없었다”고 말했다.
이마트와 롯데마트가 들어서 있는 충주에서는 실제 수퍼마켓 폐업이 속출하고 있다. 충주 수퍼마켓협동조합에 따르면 2001년 할인점 입점 이후 조합에 가입돼 있는 380여개 수퍼마켓 중 80여개가 문을 닫은 것으로 조사됐다. 폐업한 수퍼마켓 상인 중 일부는 전업을 하지만 영세상인들의 경우 꼼짝없이 실업자 신세로 전락한다. 4인 가구로 볼 때 320명의 생계가 위협을 받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직원 1~2명의 일자리도 함께 사라진다. 할인점의 등장으로 새로 생겨나는 아르바이트 일자리를 감안하더라도 피해가 더 크다고 상인들은 주장한다.
이정희 중앙대 교수는 “미국도 상위 20개 업체의 유통시장 점유율이 65%에 이르는 등 대형화로 가고 있다”면서 “규제를 통해 대형유통점을 제한하는 것은 한계가 있고, 중소 전문유통업이 특화해 균형 발전할 수 있는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원종문 남서울대 교수는 “자유경제체제에서 자본의 역외(域外) 유출은 할인점 때문에만 이뤄지는 것도 아니고, 대형할인점이라고 모두 경쟁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라면서, “지역 전체 상권의 마스터 플랜을 만들어 여러 유통업태의 공존을 모색해야지 중소유통업자를 보호하기 위해 대형유통점을 규제하는 것은 성공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사실 이마트·롯데마트 등 한국 할인점 업체들은 빠른 시간 내에 한국인에 맞는 유통 시스템을 개발, 유통 시장 개방 후 10년 동안 까르푸·월마트 등 세계적인 할인점 업체들의 공세를 깨끗이 잠재웠다. 유통 전문가들은 “중국·동남아 등 유통 후발국들이 외국계 유통업체에 시장을 다 뺏기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 유통업체들의 선전은 평가해줄 만한 일”이라고 입을 모은다.
소비자들이 느끼는 체감 서비스도 훨씬 앞선다. 창고 같은 매장에 물건만 천장 끝까지 쌓아 올려 놓고, 상품 내용을 물어볼 판매직원 찾기도 하늘의 별 따기인 선진국 할인점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가격 파괴’가 가능하다. ‘최저가가 아니면 보상해주겠다’고 자신 있게 말할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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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열쇠는 ‘한국적 할인점’의 독특한 운영방식에 있다. 우선 판촉사원 제도. 식품회사 등 할인점 입점 업체 소속 직원들이 ‘판촉’을 한다는 명분으로 할인점에 상주하면서 물건을 판다. 할인점들은 인건비를 안 들이고도 친절한 판매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 ‘수수료 매장’이라는 것도 우리 만의 노하우 상품. 할인점은 상품을 자기 책임으로 사 직접 판매하는 게 원칙. 그러나 수수료 매장에서는 입점 업체가 자기 물건을 갖다 팔고, 할인점은 판매금액의 일정비율을 수수료로 챙긴다. 이 영업방식은 ‘사실상 부동산 임대업’이라는 비아냥을 듣고 있는 백화점과 똑같은 방식이다.
‘테넌트(tenant·임차)매장’이라는 임대 매장도 경쟁적으로 늘리고 있다. 임대 수수료도 처음에는 매출의 7% 내외 수준에서 시작했지만 지금 일부 패션매장은 20%를 넘겨 백화점 수준에 버금간다. 테넌트 매장에는 패밀리 레스토랑·빵집·패스트푸드점 등 외식점은 물론 병원·약국·안경점·동물병원 등까지 사실상의 ‘종합쇼핑몰’을 구축한다. 이제는 보험상품도 판다.
저가 수입품 비중높아 국내 중소제조업 설곳 잃어
한국수퍼마켓조합연합회 임실근 전무는 “사실상의 종합 쇼핑몰이 교외가 아닌 시내 한가운데에 진출하게 되면서 주변 상권은 초토화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할인점들은 지역 상인들이 변신할 수 있는 시간을 줘야 하는데 아무 대책이 없으니, 지자체들이 교통영향심의·건축심의 등 부수적인 문제들로 시비를 걸어 소모적인 논쟁만 일으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한 식품업체 사장은 “할인점은 싼 가격만 강조하면서 중국·동남아 등의 저가 상품 판매비율을 높여, 국제수지·중소제조업·유통업 등에 모두 악영향을 주고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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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의 영세상인 숫자(가족포함)는 통계를 낼 수 없을 정도로 들쭉날쭉이다. 많게는 700만~800만명까지 보기도 하고, 적게는 200만~300만명으로 줄어든다.
중소기업청 통계에 따르면 지난 2004년 말 현재 전국의 시장 상인숫자는 28만2212명. 직접 고용 종업원 숫자(10만6785명)를 더하면 38만8997명으로 늘어난다. 4인 가족을 기준으로 한다면 150만 명이 훌쩍 넘어서는 셈. 그러나 시장상인에 영세 상인을 더하면 숫자는 훨씬 많아진다. 한국체인스토어협회는 “전국 소매업 사업체 수는 65만개, 종사자는 153만명이며 이들의 95%(145만명)가 생계형 영세업자”라고 밝혔다. 한계에 처한 시장상인이라 할 수 있는 생계형 영세업자와 가족수만 580만명(4인 가족 기준)에 달한다는 뜻이다.
전국 재래시장의 현주소는 말하기조차 창피할 정도다. 시설은 영세하고, 소유형태도 영세하기 짝이 없다. 객관적으로 봐도 대기업의 영업력, 자금력 및 선진 판매 노하우에 대항한다는 게 불가능하다. 그렇다 보니 매출은 하향곡선이다. 중소기업청이 지난 2004년 말 현재 판매실태를 조사한 결과 전국적으로 1년 전보다 판매실적이 늘어난 지역은 단 한 곳도 없었다. 특히 서울과 대구·부산·대전·울산·전북·경남지역 재래시장 매출액이 상대적으로 많이 감소했다.
조직력도 형편 없다. 전국 시장 중 상인조직이 있는 시장은 64%선. 나머지는 아예 상인연합회 등 조직 자체가 없다. 주변에 할인점 등 충격파가 몰려오면 집단 대항이나 협의조차 못한 채 그대로 주저앉을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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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신(新)공존’ 전략은 ‘법 규제’에 머무는 것은 아니다. 일본은 인구감소, 고령화로 인해 주택과 먼 원(遠)거리에서 대량 판매를 기본으로 한 대형점 시대는 곧 종말을 맞는다. 그 대신 경제력을 쥔 노인들이 접근하기 편한 마을 상점의 필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아직 구상 단계지만 주택가를 중심으로 복지시설, 병원, 중소규모 상점가가 모인 ‘콤팩트시티(Compact City)’가 일본 정치권에서 논의되는 공존 모델이다.
‘작은 정부’를 신앙으로 하는 현 고이즈미 정부는 유통시장 정책만은 ‘큰 정부’를 택했다. 대형점이 영세 상점을 초토화시키면서 자영업자 몰락 현상이 한계에 달했기 때문이다.
실제 할인점의 공격은 거셌고, 영세업체들의 몰락은 극심했다. 일본 규슈 구마모토현 야쓰시로(八代)시. 2004년 11월과 작년 6월 인구 14만명인 이 도시에 대형점 2곳이 문을 열었을 때 1㎞쯤 떨어진 중심가 상점과 대형점이 각서를 교환했다. ①상점가와 대형점을 오가는 자전거를 대형점이 무료로 임대 ②상점가와 대형점을 연결하는 무료 셔틀버스를 대형점이 운행 ③대형점 광고 전단지에 상점가 코너를 게재….
하지만 역부족. 대형점 출점 후 중심가를 통행하는 인구가 30%나 감소하고 소규모 상점들 15%가 문을 닫았다. 집객(集客) 기능을 가졌던 쇼핑몰 ‘야쓰시로 사티’도 오는 2월 문을 닫는다.
결정적인 계기는 1997년 ‘대점법(大店法·대규모 소매점포법)’이라는 초강력 규제법의 폐지였다. 대점법 폐지로 대형점 출점 제한, 폐점 시간, 휴업 일수 등 규제가 풀렸다.
연중무휴, 24시간 쉼 없이 돌아가는 초대형 점포의 신규 출점은 폭발적이었다. 도쿄 인근 사이타마(埼玉)현의 경우 지난 5년간 새로 생긴 대형점이 ‘도쿄돔’ 20개를 합친 면적인 95만㎡에 이른다. 정부의 규제가 할인점과 영세업자들 간의 윈·윈(공생)으로 결실을 맺을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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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통경영대학 다니고, 시장 상품권 발행
지난 24일 서울 망우동 ‘우림시장’. 설 장을 보러 나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고객들의 어깨가 맞닿지 않고서는 걸어갈 수가 없다. 우림시장은 1999년 까르푸, 2000년 이마트가 연이어 인근에 입점, 파리만 날리던 곳이었다. 생선가게 주인 강두선(53)씨는 “6개월은 손가락만 빨았다”고 회고했다.
절망에 빠져 있던 상인들은 똘똘 뭉쳐 2001년 국내 처음으로 비가림시설(아케이드)을 설치했다. 쇼핑 카트도 120대나 장만했다. 점포마다 카드결제기를 들여놨다. 서비스도 몇 단계나 업그레이드시켰다. 쇼핑이 편리해지면서 떠났던 고객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매출도 급신장했다.
우림시장 상인회 관계자는 “지금 4평짜리 점포 권리금이 최소 3000만원이야. 점포가 190개가 넘는데 3년간 주인 바뀐 데는 딱 3군데뿐”이라고 말했다. 우림마트 성미애(41) 사장은 “할인점을 겁내고만 있어서는 안 된다”며 “싸고 좋은 물건 열심히 찾아 다니면 우리도 경쟁력은 얼마든지 키울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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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설개선보다 더 돋보이는 것은 상인들의 의식 변화다. 민성기 상인회장은 “작년부터 8주 단위로 상인들을 시(市)가 운영하는 유통경영대학에 다니게 했다”면서 “서비스 의식 개혁이 목적”이라고 말했다. 재래시장으론 드물게 상품권도 발행한다. 노점에서도 통용되는 이 상품권은 올해 설 대목에만 2억원어치나 팔렸다.
충남 논산 ‘화지중앙시장’의 이인영(41)씨는 15년간 하던 옷 가게를 때려치우고 작년 야채 가게로 바꿨다. 그의 전략은 시장과 마트의 결합. 가게를 밝게 하고 모든 야채에 정가표와 원산지 표시를 붙여 마트식으로 깔끔하게 진열했다. 1000원 이상 물건은 어디든 배달까지 해줬다. 그는 “처음엔 시장분위기와 안 맞는다고 손님들에게 외면당했지만 6개월쯤 지나자 품질 좋고 싸다는 소문이 나면서 매출이 120% 이상 늘었다”고 말했다. 새벽 3시에 기상, 대전 도매시장을 돌면서 직접 물건을 떼어온다. 그가 파는 야채가 인근 대형 마트보다 30~40% 이상 싼 이유다.
◆고급화로 승부하는 재래시장
부산 남천동 해변시장엔 30만원짜리 대구도 있다. 인근 대형 마트에선 배추가 1포기 2500원이지만 여기선 3500원이다. 해변시장상인회 전상윤 상무는 “활어와 야채는 전국 최고의 품질임을 자부한다”면서 “2~3년 전 대형 마트에 빼앗겼던 고급 손님들이 다시 돌아왔다”고 말했다.
경기 용인시장의 과일 가게 ‘AD농산’은 매장 면적이 8평도 안 되지만 12만원짜리 무등산 수박을 1주일에 무려 50개쯤 판다. 해마다 최상품 곶감도 수억원어치씩 판다. 정덕순(51) 사장은 “국내 최고 품질의 과일은 우리 가게에 다 있다”며 “1978년부터 품질검사가 까다로운 에버랜드에도 과일을 납품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특화와 대형화·서비스 의식 개선을 재래시장의 생존비결로 꼽는다. 현재 국내 재래시장에서 대형시장은 1.9%, 특화시장은 2.9%에 불과하다. 시장경영지원센터 김유오 선임연구원은 “똑같은 서비스와 물건으론 대형 유통업체에 대항할 수 없다”면서 “상인들도 ‘무엇을 팔 것인가’보다 ‘어떻게 팔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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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자본주의의 최첨단을 걷는 홍콩에서 재래시장이 여전히 경쟁력을 갖는 비결은 무엇일까? 시민들과 상인이 공통적으로 꼽는 첫 번째 이유는 저렴한 가격. 가령 달걀 6개짜리 한 꾸러미에 5홍콩달러(650원)로 저스코·웰컴 등 할인점 가격(7~10홍콩달러)보다 최소 20% 정도 싸다. 주부 청호이얀(45)씨는 “할인점에서는 쇠고기를 파운드당 25홍콩달러를 줘야 사지만, 여기서는 20홍콩달러면 충분해 20% 이상 돈을 절약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신선도도 무기다. 재래시장에서는 펄펄 뛰는 생선과 신선한 육류를 현장에서 보면서 골라 사는 재미가 쏠쏠하다. 싱허(興和)육식공사(肉食公司) 웨이둥(偉東·58)씨는 “광둥성 중산(中山)과 둥관(東莞)산 돼지고기 및 쇠고기를 직수입해 중간거래상을 거치지 않고 직접 팔아 훨씬 고기가 싱싱하고 값도 20~30% 정도 싸다”고 자랑했다.
강점은 △다양성 △가격경쟁력 △접근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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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강점은 싸다는 것. 시장 상인들과의 밀고 당기는 가격협상의 풍취도 남아 있고, 실제 큰 폭의 할인도 가능하다.
하지만 가격과 다양성을 앞서는 ‘아메요코’의 최대 강점은 역시 ‘접근성’이다. 도쿄 시민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JR라인의 우에노역을 끼고 있다. 우에노역은 도쿄·신주쿠·이케부쿠로역과 함께 도쿄의 최대 역세권을 형성하고 있다. 반면 주로 땅값이 싼 외곽 지역에 자리잡은 대형점은 자가용 없이는 접근하기 힘들다.
자료관리 담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