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일보] 계양산 파괴는 후손에 대한 범죄
우리나라는 적도 이북에 위치한다. 바람이 대개 서쪽에서 동쪽으로 분다. 지구가 자전하는 까닭이다. 그런 편서풍은 여름과 겨울이 다르다. 남태평양 고기압이 영향을 주는 여름과 달리 겨울에는 시베리아 고기압이 시린 바람을 공급한다. 장마철과 삼복더위가 지나 다가오는 편서풍은 기상대도 예견하지 못하는 물풍선을 여기 저기 떨어뜨리는데, 중국 장강 유역에서 함유된 수증기가 우리나라의 차가운 공기를 만나기 때문이란다. 최근 빈발하는 국지성호우가 그것이다.
천만다행으로, 겨울의 북풍한설을 막고 여름에 빗발치는 호우를 완충해주는 아버지 같은 자연이 우리나라에 있다. 금수강산을 든든하게 지키는 진산이다. 크고 작은 마을은 진산의 품에 안겨 양지바른 겨울을 맞았고 여름이면 진산에서 기원하는 하천에서 목을 축일 수 있었다. 하천은 물고기를 내주는데 그치지 않는다. 하천 아래에는 논을, 위에는 밭을 일구었다. 조상은 선조의 영택(靈宅)을 내주는 진산에서 실한 목재를 구해 초가삼간에서 대궐까지 지을 수 있었다.
지역의 문화요 역사인 진산,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는 진산을 주민들은 경외했다. 불경스럽게 산을 오른다고 하지 않았다. ‘산에 든다’면서 나막신도 마다했다. 딸깍 딸깍, 아버지와 같은 산을 아프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진산이 곤혹을 치루고 있다. 서구 합리주의라는 주술에 빠져 존재가치보다 이용가치를 앞세우는 자의 배타적인 돈벌이를 위해 파괴된다. 진산의 가치를 무시하거나 외면하는 이에 의해 개발의 포클레인이 춤을 추는 것이다.
송전탑이 전자파를 내뿜는 것은 애교에 불과하다. 목표와 속도를 위한 아스팔트 도로는 산허리를 이리저리 뚫거나 통째로 절개한다. 산록과 기슭을 파고드는 아파트와 골프장은 진산의 생태적 균형을 교란한다. 반만년 이상 경외되던 진산이 급기야 당대에서 그 종말을 예고한다. 진산이 파괴되면 백성의 삶은 온전할까. 송전탑이 돋자 마을에 괴질이 도는 현상은 무지가 빚는 억지가 아니다. 숲과 지하수의 결을 교란해 생태계의 균형이 깨지면 그 영향은 마을에 미칠 수밖에 없다.
계수나무와 회양목이 많던 계양산은 인천의 진산이다. 625 이후 춥고 배고픈 시민에게 땔감을 내주며 헐벗었던 진산의 처지는 지금 어떤가. 존재가치보다 이용가치를 앞세우는 후손들의 손아귀에 마구 파괴되고 있다. 군부대가 차지하더니 송전탑이 산허리를 점령했고 기슭으로 파고드는 주택에 산록을 잃었다. 진산의 앞뒤와 좌우는 속도를 지고의 선으로 모시는 아스팔트에 맥을 끊겼는데, 이제 대기업 롯데에서 마지막 철퇴를 내리치려 한다. 골프장으로 가녀린 숨통을 틀어막으려는 것이다.
1990 초, 시민의 열화 같은 반대 집회로 무산된 골프장을 15년 만에 재촉하는 대기업 롯데는 무엇인가. 이윤을 위해 아무리 물불 가리지 않는 게 기업이라지만, 기업에도 윤리가 있다. 아동착취를 거부하고 생태계 보전에 공조하는 이른바 ‘페어트레이딩’이 기업윤리로 주목받는 시절이 아닌가. 소비자 덕택에 성장한 롯데는 기업윤리와 절연되었을 리 없다. 그런데 롯데와 공조하려는 지방자치단체는 무엇인가. 당대는 물론 후손의 생명까지 지킬 책무를 지닌 단체가 아닌가. 아스팔트와 시멘트 콘크리트가 늘어나는 만큼 녹지가 중요해지는 오늘, 기업의 이윤과 일부 계층의 질펀한 놀이를 위해 진산의 속살마저 뜯어가라고 파괴 면허를 내주려 하다니,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죄인을 자처하려는가.
땅의 형세로 인간의 길흉화복을 설명하는 풍수는 미신이 아니다. 4천년 이상 이어온 과학이다. 100년도 못 가 이론이 허물어지는 서양 과학과 차원이 다르다. 진산에 기대 살던 우리는 도심 속의 녹색섬처럼 버림받고 있는 계양산을 보전하도록 노력해야 옳다. 녹지가 모자라는 만큼 폭력이 난무하는 도시에 푸른 생명을 불어넣어야 한다. 미세먼지와 대기오염에 시달리는 도시를 녹색으로 구해야 한다. 이는 조상을 가진 자가 반드시 지켜야 할 후손의 정언명령이다. (인천신문, 2006년 9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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