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의 바람속에 추억은 여전히…
-말 무덤 있던곳 생겨난 마을 등성이 위치… ‘등세이’ 불려-
2006-05-01 <>
변화의 바람속에 추억은 여전히…
말 무덤 있던곳 생겨난 마을
등성이 위치… ‘등세이’ 불려
부개2동
예전엔 새말이라고도 불리며 동쪽으로 부천, 남쪽으로 경인전철에 접하고 있는 교통의 요충지이기도 하다. 1985년 부개동에서 부개1·2동으로 분동되었으며, 일제시대 ‘고니샘말’로 불리워진 농경지였다. 송전시설과 수리조합이 있어 부개3동에 비해 현저히 좋은 여건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던 곳이기도 하다.
송영수(72)할아버지는 “해방되가 직전 이곳에 벽돌공장이 세워져 아직도 벽돌막이라고 한다우…” 라며 예전 이야기의 말꼬를 터주었다. 1940년, 부평에 변화가 오기 시작하며 부평역전 일대에 도시계획을 실시하게 되었단다. 건축물에 소요될 벽돌의 수요가 급증될 것을 예상한 한 사업가가 연와공장을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이곳의 지질을 검사해보니 연와자재로는 최상품이라는 판정을 받아 벽돌막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그 위치가 현재 부평동중학교의 동쪽인 부개동 120 번지와 부천시 상동 32번지 일대로 넓은 벌판에 굴뚝을 쌓고 벽돌제조공장을 세웠다. 그 남쪽에 공장종업원이 기숙할 줄행랑식 막사까지 건축했다.
그러나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벽돌 한 장 생산해 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방치하게 되어 ‘벽돌막’이라는 이름만 남게 된다. 3년 후 벽돌공장 재건을 착안한 지역인사에 의해 「부평연와합자회사」가 문을 열게 된다. 회사는 인천의「조선요업」과 더불어 굴지의 벽돌공장으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부평연와가 있던 지역이 부개2동과 부천시의 경계지역에 흔적이 남아있다. 이 일대가 도시화된다면 안채와 사랑채를 인천시와 부천시가 각각 관할하게 될지도 모를 일로 이 곳 사람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곳이기도 하다.
저지대 황무지 버려진 땅
장마철 오면 ‘질퍽질퍽’
부개3동
부개동에서 가장 나중에 분동된 아파트 밀집지역으로 총 37개통 중 28개통이 아파트 단지로 구성되어 있다. 주택가 및 농지로 구성된 혼합지역으로 면적 1.09㎢에 40,791명의 주민이 함께하는 부평구 21개동 중 인구 최다지역이다.
부개3동은 대부분이 천수답으로 불모지 벌판 땅이었다. 수리시설이 미처 닫지 못해 하늘에서 내리는 비만 바라보고 살았던 마을. “이제와 돌이켜 보면 황무지였던 곳이기에 개발이 더 빠르지 않았나 싶습니다.” 정희수(64)씨는 부개3동의 변화가 빠른 만큼 뿌리를 찾기 어렵다고 한다.
1935년경 부평역에 전기가 처음 들어올 당시만 해도 부평역전에 동수재이마을(하촌)과 동남쪽에 있는 마분리 마을(부개1동)이 있을 뿐이었다.
동수재이마을에서 동쪽을 바라보면 부개천 골짜기를 건너 마분리 등성 줄기가 북으로 길게 흘러 내려 구릉지대를 이루었다. 이곳은 황토색 찰진흙땅으로 장마철이면 농사는 고사하고 사람이 신발을 신고 통행도 못할 지대였다.
“그야말로 대여섯 채 정도의 농가를 제외하곤 모두가 논, 밭이었던 곳이…이렇게 변하다니…” 세월의 변화는 주름살만큼 많은 아파트를 올려놓았다는 윤종석(77) 할아버지. 파평 윤씨 일가가 대를 잇고 살았던 곳인데, 이젠 그 흔적은 모두 사라지고 80% 이상이 객지사람이라고 한다. 아파트 입주민들은 길주대로의 완공으로 교통요지로 부상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혜선 기자>
2hyesun@hanmail.net
유래를 찾아서-십정1,2,동
노란 개나리 울타리 너머로 시루팥떡 나눠먹던 이웃들은 온데간데없지만 십정동은 어느 동보다도 들을 옛 이야기가 많다. 전철이 들어서면서 높은 산을 자른 원통고개이야기, 호랑이가 나왔다는 신동아 아파트 쪽 산악골 이야기, 천일염전 갑부가 금지팡이를 짚고 다녔다는 이야기, 마을 끝자락에 있어 ‘끝밭골’, 꽃재배를 많이 해서 ‘꽃밭골’, 명포수가 묵은 여우를 잡았다는 여우재비 이야기며, 열 개 우물이 있어 십정동(十井洞), 아무리 추워도 물이 따뜻하고 열(熱)이 난대서 열우물…
십정동은 본래 한 가닥으로 십정2동과 부평3동으로 나뉘어졌다.
구한말 인천군 주안면 십정리지역으로 1914년 부천군 다주면 십정리로 편제 되었다가 1940년 다시 인천부에 편입되었다. 1946년 십정동으로 개칭. 1985년 십정1동과 십정2동으로 분동했다. 1995년 인천직할시가 광역시로 승격되고 북구가 부평구와 계양구로 분구됨에 따라 1995년 1월1일 인천광역시 부평구 십정동이 되었다.
십정동은 우물이 열 개가 있어 열우물(十井) 십정리라 했는데 일설에는 현 상정초등학교 위쪽에 큰 대동우물이 있어 물량이 많고 아무리 추워도 물이 따뜻한 열(熱)이 많이나 열우물이라 했다는 말도 있다.
송이버섯 같은 초가에서 모락모락 연기 피어오르던 달동네 십정동은 가난을 이고 진 한(恨))이 서려있다. 지금도 7·80년대 분위기의 열악한 주거환경이 그대로인 채 생존권을 주장하는 곳도 있고 재개발 바람이 불어 고층 아파트들이 들어선 곳도 있다.
끝밭골 꽃밭골
문병훈씨는 바로 잡을 게 하나 있다고 일러준다.
“동암역 남광장 부근으로 해서 꽃밭골이라는 표현은 잘못됐지. 정식 명칭은 끝밭골이야. 십정동에서 밭이 끝나는 동네라서 그렇게 불렸는데 발음이 불편해서인지 꽃밭골로 변하게 됐어. 십정2동에 사는 사람들이 ‘꽃밭골 축제’, ‘꽃밭골길’ 이렇게 부르니까 동네에 아주 큰 화훼단지나 꽃 군락지가 있었나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아니야. 이제 제대로 된 뜻을 찾았으면 싶어.”
그 말씀이 기이하게도 부평농협이 부흥로터리 옆에 「화훼공판장」을 마련해 운영하다가 도시발전으로 철거되고 이전할 장소를 물색하던 중, 이곳에 자리 잡아 성업 중에 있으며, 사거리 번화가에 대형 화원이 문을 열어 “꽃밭골"을 안내하듯 행인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서구방향으로 가는 길목 위쪽에는 서낭신을 모신 ‘서낭당’이 지금도 보존되어 있다. 예부터 누대를 살아온 토박이들, 마을 역사를 생생히 기억해 줄 어르신들도 돌아가시거나 노환으로 인해 찾아뵙기 힘들어졌다. 향토사를 학자들만이 쓰는 것은 아닐 지니 주민들이 마을사에 관심을 갖고 좀 더 연구해서 고증을 찾아보거나 동네 변천사를 기록해 둠이 옳을 듯하다.
<조은숙 기자> eyagi9090@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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