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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 바람속에 추억은 여전히…

-말 무덤 있던곳 생겨난 마을 등성이 위치… ‘등세이’ 불려-

2006-05-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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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 바람속에 추억은 여전히…

변화의 바람속에 추억은 여전히…

말 무덤 있던곳 생겨난 마을
등성이 위치… ‘등세이’ 불려

부개1동
부개동은 이름 그대로 명실 공히 부평의 초입지이다. 부개1동은 부평도호부 때 동수재이와 황굴, 구산과 함께 속한 시골 마을이었다. 일제 때는 ‘고니샘말’로 불리다가 한 말에 군·면·리의 행정구분을 정하며, 부평군 동소정면 ‘마분리(말무덤)’로 되었다.
50년 역사를 지닌 부개초등학교 4회 졸업생 이창하(60,주민자치위원장)씨는 “부개초등학교 밑에 원마을이 있었는데, 그 북쪽 등성이인 경인산업도로 부근일대가 모두 마분일겁니다”라며 현재 마분공원이 유일한 놀이터였던 어린 시절을 추억한다. 이 씨는 현재 신명여고에서 교직을 담당하며 수대에 걸쳐 부개동에 살고 있다.
숙종대왕 임언군의 후손인 이 씨는“마분리는 이 서방네 집성촌”이라고 증언한다. 또한, 부개1동은 북쪽 등성이에 1913년 경인국도가 생기면서 처음으로 인가가 들어서게 되었는데 등성이에 있는 마을이란 뜻에서 '등세이'로도 불렸다. 부개산의 북쪽으로 흘러 내려 경인철도까지 이르는 낮은 언덕지대의 굴재미 마을은 부평6동과 부개1동의 경계지점이기도 하다. 이곳엔 해방 후 군소공장지대로 많은 공장들이 들어서게 된다. 부개지구 도시계획이 실시된 후 이 공장들이 문을 닫고 아파트와 연립주택 등이 들어서 주택단지로 변하고 있는 중이다.
한국아파트 단지의 동쪽 담장을 끼고 부개산을 향해 올라가면 골짜기의 마을이 보인다. 산골짜기 안에 있으므로 ‘산동네’라 불려오고 있다. 고층 건물로 인하여 겉으로 보기에는 이런 곳에 인가가 있음을 전혀 모르고 있어 행정력이 미치지 못한 지역이기도 하다. 앞으로 이곳일대가 주거환경개선지구로 지정되어 추진 중이므로 부개1동의 변화와 발전을 기대해본다.
 


벽돌공장 세워져 ‘벽돌막’
부천과 경계지역에 ‘흔적’

부개2동
예전엔 새말이라고도 불리며 동쪽으로 부천, 남쪽으로 경인전철에 접하고 있는 교통의 요충지이기도 하다. 1985년 부개동에서 부개1·2동으로 분동되었으며, 일제시대 ‘고니샘말’로 불리워진 농경지였다. 송전시설과 수리조합이 있어 부개3동에 비해 현저히 좋은 여건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던 곳이기도 하다.
송영수(72)할아버지는 “해방되가 직전 이곳에 벽돌공장이 세워져 아직도 벽돌막이라고 한다우…” 라며 예전 이야기의 말꼬를 터주었다. 1940년, 부평에 변화가 오기 시작하며 부평역전 일대에 도시계획을 실시하게 되었단다. 건축물에 소요될 벽돌의 수요가 급증될 것을 예상한 한 사업가가 연와공장을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이곳의 지질을 검사해보니 연와자재로는 최상품이라는 판정을 받아 벽돌막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그 위치가 현재 부평동중학교의 동쪽인 부개동 120 번지와 부천시 상동 32번지 일대로 넓은 벌판에 굴뚝을 쌓고 벽돌제조공장을 세웠다. 그 남쪽에 공장종업원이 기숙할 줄행랑식 막사까지 건축했다.
그러나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벽돌 한 장 생산해 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방치하게 되어 ‘벽돌막’이라는 이름만 남게 된다. 3년 후 벽돌공장 재건을 착안한 지역인사에 의해 「부평연와합자회사」가 문을 열게 된다. 회사는 인천의「조선요업」과 더불어 굴지의 벽돌공장으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부평연와가 있던 지역이 부개2동과 부천시의 경계지역에 흔적이 남아있다. 이 일대가 도시화된다면 안채와 사랑채를 인천시와 부천시가 각각 관할하게 될지도 모를 일로 이 곳 사람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곳이기도 하다.


저지대 황무지 버려진 땅
장마철 오면 ‘질퍽질퍽’

부개3동
부개동에서 가장 나중에 분동된 아파트 밀집지역으로 총 37개통 중 28개통이 아파트 단지로 구성되어 있다. 주택가 및 농지로 구성된 혼합지역으로 면적 1.09㎢에 40,791명의 주민이 함께하는 부평구 21개동 중 인구 최다지역이다.
부개3동은 대부분이 천수답으로 불모지 벌판 땅이었다. 수리시설이 미처 닫지 못해 하늘에서 내리는 비만 바라보고 살았던 마을. “이제와 돌이켜 보면 황무지였던 곳이기에 개발이 더 빠르지 않았나 싶습니다.” 정희수(64)씨는 부개3동의 변화가 빠른 만큼 뿌리를 찾기 어렵다고 한다.
1935년경 부평역에 전기가 처음 들어올 당시만 해도 부평역전에 동수재이마을(하촌)과 동남쪽에 있는 마분리 마을(부개1동)이 있을 뿐이었다.
동수재이마을에서 동쪽을 바라보면 부개천 골짜기를 건너 마분리 등성 줄기가 북으로 길게 흘러 내려 구릉지대를 이루었다. 이곳은 황토색 찰진흙땅으로 장마철이면 농사는 고사하고 사람이 신발을 신고 통행도 못할 지대였다.
“그야말로 대여섯 채 정도의 농가를 제외하곤 모두가 논, 밭이었던 곳이…이렇게 변하다니…” 세월의 변화는 주름살만큼 많은 아파트를 올려놓았다는 윤종석(77) 할아버지. 파평 윤씨 일가가 대를 잇고 살았던 곳인데, 이젠 그 흔적은 모두 사라지고 80% 이상이 객지사람이라고 한다. 아파트 입주민들은 길주대로의 완공으로 교통요지로 부상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혜선 기자>
2hyesun@hanmail.net

 

어디서든 맑은 물 ‘콸콸’
국내 첫 천일염 생산지역

유래를 찾아서-십정1,2,동
노란 개나리 울타리 너머로 시루팥떡 나눠먹던 이웃들은 온데간데없지만 십정동은 어느 동보다도 들을 옛 이야기가 많다. 전철이 들어서면서 높은 산을 자른 원통고개이야기, 호랑이가 나왔다는 신동아 아파트 쪽 산악골 이야기, 천일염전 갑부가 금지팡이를 짚고 다녔다는 이야기, 마을 끝자락에 있어 ‘끝밭골’, 꽃재배를 많이 해서 ‘꽃밭골’, 명포수가 묵은 여우를 잡았다는 여우재비 이야기며, 열 개 우물이 있어 십정동(十井洞), 아무리 추워도 물이 따뜻하고 열(熱)이 난대서 열우물…
십정동은 본래 한 가닥으로 십정2동과 부평3동으로 나뉘어졌다.
구한말 인천군 주안면 십정리지역으로 1914년 부천군 다주면 십정리로 편제 되었다가 1940년 다시 인천부에 편입되었다. 1946년 십정동으로 개칭. 1985년 십정1동과 십정2동으로 분동했다. 1995년 인천직할시가 광역시로 승격되고 북구가 부평구와 계양구로 분구됨에 따라 1995년 1월1일 인천광역시 부평구 십정동이 되었다.
십정동은 우물이 열 개가 있어 열우물(十井) 십정리라 했는데 일설에는 현 상정초등학교 위쪽에 큰 대동우물이 있어 물량이 많고 아무리 추워도 물이 따뜻한 열(熱)이 많이나 열우물이라 했다는 말도 있다.
송이버섯 같은 초가에서 모락모락 연기 피어오르던 달동네 십정동은 가난을 이고 진 한(恨))이 서려있다. 지금도 7·80년대 분위기의 열악한 주거환경이 그대로인 채 생존권을 주장하는 곳도 있고 재개발 바람이 불어 고층 아파트들이 들어선 곳도 있다.

열우물 고개

열우물 고개는 백운역과 동암역 사이의 고개를 말하는데 열우물 마을이 있어 불러 온 고개 이름일 것이다. 시사편찬자료에 보면 헌종 8년(1842년)의 지도에는 우물목고개(十項峴)라 했고 광무 3년(1899)에 발행된 도면에는 십정현(十井峴)이 열우물고개로 나와 있다.
이런 열우물 고개도 자동차가 빈번하게 왕래하는 신작로가 생겨나고 백운공원과 부평도서관 사이 대로는 주안과의 거리를 단축시키고 있다.
백운공원 맞은편(성각사 쪽)은 행정구역상 부평3동으로 되어있으나, 원래는 십정동 한 가닥에서 분동된 것으로 지금은 부평문화예술회관을 짓기 위한 공사가 시작됐다. 이 곳 서쪽 열우물고개는 돌산, 채석장으로 많은 골재를 채취했는데 부평건설에 크게 쓰여 졌으며 그 부지에 주택단지가 들어서 백운역의 이름을 따 백운주택이라 불러오고 있다.
이조중엽부터 지금까지 십정동에서 10대째 살고 있는 문병훈(71) 어르신을 만나면서 십정동 유래 찾기에 운이 트였다. 동사무소에서 빌려온 ‘구정백서’와 부평문화원 ‘향토사’ 인터넷 검색, 인천시사편찬 자료의 도움은 크다. 21개동 유래 찾기는 십정동을 마지막으로 끝맺는다. 토속민을 만나면 농사짓던 얘기부터 그 윗대 정황까지 100년사가 흥미진진하고 젊어서 정착하게 된 이들을 만나면 공업화, 산업화, 도시계발 발전사를 듣게 된다.
문병훈씨는 벽장 속에 들여놨던 과거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이 동네는 어디를 파도 물이 맑았어. 우물 많고 자연수 먹어서 청년들 기백이 대단했지. 힘 꽤나 쓰는 이들은 흙 구르마 바퀴를 발등에 놓고 공깃돌처럼 들어 올렸다니깐.”
맑은 물 자랑 뿐인가? 짠물도 좋다고 우리나라 최초 천일염 시험지가 동암역 사거리 주변 십정동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천일염 시험지

인천 주안 염전(십정동)은 1907년 현 주안 산업단지 지역에 천일제염 실험염전을 설치했다. 해방 후 1960년대 까지만 해도 초등학교 교과서에 우리나라 최초의 염전으로 소개되었던 우리 고장의 자랑스러운 염전이었다.
1907년 천일염전이 생기기 전에는 바닷물을 가마솥에 끓여 짠물을 졸여서 소금을 만드는 전통적인 방식을 썼다. 서해 바다 조수물의 침해를 받지 않는 높은 갯벌에 집을 지어서 이를 ‘염벗’이라 했다. 그러나 이도 천일염의 확장으로 점점 사라지게 되었고, 1980년대 인천시의 새로운 도시개발 계획에 밀려 그 자리에 남동산업단지가 생겨났다. 이처럼 개화기 우리 고장의 산 역사의 현장이 날이 갈수록 그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있음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문병훈씨는 “5공단 쪽은 뒷 방죽, 시장 쪽은 높대 방죽, 진달래 주유소 있는 쪽은 앞 방죽으로 불렸지. 한 20마지기 정도였나? 황해도 쪽에서 돛단배를 가지고 소금 실으러 올 때 부르던 노래가 있었지. ‘돈 실러 가자 돈 실러 가자 열우물 배도정으로 돈 실러 가자.’ 염벗하는 부자들도 많았지. 금지팡이를 짚고 다니니까 일본 순사가 졸졸 따라 다녔다는 말도 있어.”

끝밭골 꽃밭골
문병훈씨는 바로 잡을 게 하나 있다고 일러준다.
“동암역 남광장 부근으로 해서 꽃밭골이라는 표현은 잘못됐지. 정식 명칭은 끝밭골이야. 십정동에서 밭이 끝나는 동네라서 그렇게 불렸는데 발음이 불편해서인지 꽃밭골로 변하게 됐어. 십정2동에 사는 사람들이 ‘꽃밭골 축제’, ‘꽃밭골길’ 이렇게 부르니까 동네에 아주 큰 화훼단지나 꽃 군락지가 있었나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아니야. 이제 제대로 된 뜻을 찾았으면 싶어.”
그 말씀이 기이하게도 부평농협이 부흥로터리 옆에 「화훼공판장」을 마련해 운영하다가 도시발전으로 철거되고 이전할 장소를 물색하던 중, 이곳에 자리 잡아 성업 중에 있으며, 사거리 번화가에 대형 화원이 문을 열어 “꽃밭골"을 안내하듯 행인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서구방향으로 가는 길목 위쪽에는 서낭신을 모신 ‘서낭당’이 지금도 보존되어 있다. 예부터 누대를 살아온 토박이들, 마을 역사를 생생히 기억해 줄 어르신들도 돌아가시거나 노환으로 인해 찾아뵙기 힘들어졌다. 향토사를 학자들만이 쓰는 것은 아닐 지니 주민들이 마을사에 관심을 갖고 좀 더 연구해서 고증을 찾아보거나 동네 변천사를 기록해 둠이 옳을 듯하다.
<조은숙 기자> eyagi9090@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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